푸른색 셔츠 한장으로 트럼프에 반대한 코로나 사령관

채민기 기자 2020. 5. 1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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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민기의 신사의 품격]앤서니 파우치 박사의 버튼다운 셔츠

스티브 잡스는 애플 직원들에게 유니폼을 입히고자 했다. 일본 소니가 전후(戰後) 궁핍했던 시절에 직원들에게 나눠주던 옷이 유니폼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에 감명받아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한 조끼형 유니폼에 직원들은 경악했다. 유니폼은 없던 일이 됐지만 대신 잡스는 이 일로 친해진 미야케에게 자신을 위해 검은색 터틀넥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잡스 전기는 검은 터틀넥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터틀넥 차림의 스티브 잡스.

미야케가 100벌쯤 만들어줬다는 터틀넥은 이후 실리콘밸리의 다른 기업가는 물론, 신제품 발표회 때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를 입고 보타이를 맸던 예전의 잡스 자신과도 분명한 대비를 이루는 혁신가의 유니폼이 됐다. 같은 디자인의 옷을 계속 입다 보면 사람과 옷이 이렇게 서로 녹아들기 마련이다.

요즘들어 옷차림으로 이런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 미 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NIAID) 소장 앤서니 파우치(79) 박사다. 미국의 코로나 방역 사령탑인 파우치 박사는 항상 푸른색 계열의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매스컴에 등장한다. 백악관 브리핑룸에서도, 자가 격리 중에 미 의회에 화상으로 출석해 증언했을 때도 이 셔츠를 입었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2007년의 프로필 사진도 흰 의사 가운을 입었다는 점이 다를 뿐 푸른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있다. 옷장에 이 셔츠가 적어도 스무 벌은 걸려 있을 것이다.

백악관 브리핑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나란히 선 앤서니 파우치(오른쪽) 박사. 셔츠 칼라 모양이 대통령과 대조를 이룬다. /AFP 연합뉴스

버튼다운 셔츠는 폴로 경기에서 말을 타고 달려도 칼라가 나풀거리지 않도록 단추로 몸판에 고정시키던 데서 유래했다. 스포츠 유니폼도 예의와 범절을 따지던 시절에 탄생한 이 디테일을 대중화한 것은 미국 남성복의 대표주자 브룩스브라더스였다. 이후 20세기 초반에 아이비리그(미 동부 명문 사립대) 학생들이 즐겨 입으면서 이들의 스타일을 바탕으로 한 프레피룩(preppy look)의 핵심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다.

프레피는 우등생이지만 공부벌레와는 약간 다르다. 리더십이 강하고 각종 스포츠에도 뛰어나다는 이미지가 있다. 버튼다운 셔츠에는 그 젊은이다운 발랄함과 자유분방함이 있다. 이 셔츠를 입었던 이들이 대체로 ‘자유로운 영혼’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셔츠 소매 위에 시계를 차는 파격의 주인공 지아니 아넬리는 버튼다운 셔츠도 칼라 끝의 단추를 채우지 않고 무심하게 입었다. 앤디 워홀도 버튼다운 애호가였다. 다만 그가 버튼다운을 입었던 것은 예술가도 보통의 생활인과 똑같다는 생각의 표현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보통’, ‘관습’, ‘격식’따위와는 가장 거리가 먼 현대미술의 전위로 남은 것은 아이러니다.

프레피는 자신의 관심사 외에는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 너드(nerd·괴짜)와도 다르다. 그 대비를 잘 보여줬던 장면이 파우치 박사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화상 대담이었다. 이 장면은 코로나 사령관과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제국 수장의 만남이기도 했지만, 항상 파란색 버튼다운을 입는 아이비리그 프레피(파우치 박사는 대학원이긴 하지만 코넬 출신이다)와 항상 회색 티셔츠만 입는 실리콘밸리 너드(저커버그는 ‘시시하고 바보 같은 데’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어서 회색 티셔츠만 입는다고 밝힌 바 있다)의 만남이기도 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화상 대담중인 앤서니 파우치(오른쪽) 박사. 소셜미디어 제국의 수장과 코로나 방역 사령관의 만남이자, 회색 티셔츠와 푸른 버튼다운 셔츠의 만남이기도 했다. /유튜브 캡처

버튼다운 셔츠는 약간 캐주얼한 느낌이 있어서 격식을 엄격하게 갖춘 슈트에는 잘 입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버튼다운 셔츠를 매일 입는 파우치 박사는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해 보통의 드레스셔츠를 입는 남자들의 무리에서 본인을 차별화할 수 있었다. 파우치 박사는 거침이 없다. 대통령이 바로 옆에 서 있어도 반대 의견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가 애당초 대통령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일체의 정치적 고려와 거리를 둔 전문가라는 사실을 셔츠가 증명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파우치 박사의 푸른 버튼다운 셔츠가 ‘금욕적 프로정신(stoic professionalism)’을 부각시킨다고 분석했다.

정통 버튼다운 셔츠는 옥스퍼드 천으로 만든다. 색깔은 흰색 아니면 파란색. 살짝 까슬까슬한 느낌이 있어서 비슷한 질감의 니트 넥타이와 잘 어울린다. 웃옷도 광택이 반지르르한 슈트보다는 트위드나 플란넬처럼 거친 소재의 재킷과 궁합이 좋다. 패션에서는 실루엣이나 색상뿐 아니라 질감의 조화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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