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다툼에 새우등 터지게 생긴 삼성전자의 선택은 [황정수의 반도체 이슈 짚어보기]

황정수 2020. 5. 1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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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압박에 대만 TSMC는 미국에 공장 신축 결정
같은 요구 받은 삼성전자에도 '선택의 순간' 다가와
미국 중국 치열한 반도체 패권 경쟁
미국 손 들어주면 중국과 척질수도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 대만 TSMC가 15일 "미국 애리조나에 120억달러(약 15조원)를 투자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TSMC를 지목해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한다"고 압박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지 나흘 만이다. TSMC는 대만 북부 신추, 남부 타이난 등에 회로선폭(반도체 회로의 폭) 5나노미터(nm, 1nm=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공정 생산라인을 신축하고 있다. 굳이 미국에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 가며 공장을 지을 유인이 크지 않다. TSMC는 왜 투자를 결정했을까.

① 화웨이를 지키려고 TSMC는 미국에 투자했지만…

파운드리는 공장 없이 반도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팹리스)의 주문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이다. 전 세계 시장 규모는 연 100조원 정도로 추정된다. 이 시장에서 50% 이상 점유율을 기록하며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곳이 TSMC다. TSMC 매출의 60% 정도는 미국 업체들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 퀄컴, AMD, 엔비디아 등이다. 

놓칠 수 없는 고객이 중국에도 있다.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다. 하이실리콘은 통신반도체를 설계하는 업체다. 하이실리콘은 '기린(KIRIN)'이란 이름이 붙은 통신칩 생산을 TSMC에 위탁한다. 이렇게 생산된 반도체는 화웨이의 스마트폰에 들어간다. 하이실리콘이 TSMC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10~15%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큰 걱정 없이 돈을 쓸어담던 TSMC에 작년부터 걱정거리가 생겼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중국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주요 언론에 "외국 기업이 미국 기술이 10% 이상 들어간 제품을 화웨이에 납품하지 못 하게 할 것"이라는 뜻을 흘린다.

TSMC가 쓰고 있는 반도체 장비는 미국제가 많다. TSMC가 주력하는 7nm 이하 초미세공정에 활용되는 네덜란드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장비에도 미국 기술이 들어간다. ASML이 EUV 장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미국 업체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화웨이 납품을 제한하는 정책을 실행하면 TSMC는 매출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하이실리콘의 주문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현재는 10%지만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감안할 때 앞으로 하이실리콘 비중은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TSMC가 하이실리콘 주문을 계속 받기 위해 미국 정부의 투자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게 국내 반도체 업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트럼프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으니 TSMC도 미국 정부에 "우리 사정을 봐달라"고 요구할 것이란 얘기다. TSMC의 전략이 맞아떨어질까. 안심하긴 이른 것 같다. TSMC의 투자 결정에 "게임체인저, 역사적 결정"이라고 추켜세우던 미국 정부가 몇시간 뒤 "미국 장비로 반도체 만든 외국기업들은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화웨이에 공급 가능하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수출규정을 개정해 이 조치를 시행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의 계획대로 화웨이에 대한 공급 제한이 실행되면 15조원 짜리 투자 효과는 정치적인 측면에선 '제로'에 가깝게 될 수 있다. 이래저래 TSMC의 처지가 난처하게 됐다.

② TSMC의 투자엔 삼성 견제 목적도 있다

TSMC의 결정을 정치적으로만 볼 순 없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이점도 있다. 주요 고객인 미국 팹리스들과 가까워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어서다. 

TSMC는 파운드리시장 세계 2위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회로 선폭을 좁게 하는 '초미세공정' 경쟁에서 TSMC와 대등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TSMC의 고객을 빼앗아 오기 위해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 R&D 등에 총 13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가 치고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입장에선 당연히 TSMC의 주요 고객인 미국 업체들을 빼앗아와야 한다. 실적도 내고 있다. 삼성은 미국 퀄컴, 엔비디아로부터 주문을 받고 있다. 구글과의 협력도 강화하는 상황이다. 강력한 경쟁자 삼성의 도전을 차단하기 위해서 TSMC는 미국 주요 고객들에 울타리를 칠 필요가 있다. 미국 공장은 TSMC의 삼성 차단 전략을 미국 현지에서 실행하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 15조원이란 적지 않은 돈이 투입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사진=연합뉴스


③ 삼성전자도 미국에 투자할까

삼성도 TSMC와 비슷한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 주요 매체들은 며칠 전 "삼성전자에도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지으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날 "미국 추가 투자는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로, 아직 정해진 게 없다"는 원론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처한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고민이 길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단 막대한 미국 공장 건설 비용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국내에 초미세공정 투자를 단행했다. 경기 화성캠퍼스에 대당 2000억원 이상인 ASML의 EUV 장비들을 활용해 고객들의 반도체를 생산 중이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을 책임지는 정은승 사장은 작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화성캠퍼스에 방문했을 때 "EUV 장비 50대를 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파운드리 공장에 장비 값만 10조원 이상 투자를 결정했다는 얘기다. 여기에 경기 평택캠퍼스에도 EUV 전용 라인을 조성 중이다.

미국에 최신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덴 어림잡아 10조원 이상이 들어갈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현재 100조원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필요하지 않은 미국 공장에 막대한 자금을 들일 필요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30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DSR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을 마친 후 EUV동 건설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한경DB


④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중국

삼성전자의 두 번째 고려 요인은 중국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이후 중국엔 파운드리의 잠재고객인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가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중국의 구글로 불리는 바이두로부터 인공지능(AI) 칩 물량을 수주하기도 했다. 

파운드리 관련 중국 업체들은 삼성전자의 잠정 고객 수준이지만 D램과 낸드플레시 관련해선 삼성전자의 핵심 고객이다. 화웨이는 작년까지 삼성전자의 '5대 매출처'에 꼬박꼬박 이름을 올릴 정도로 삼성전자의 D램과 낸드플래시 물량을 쓸어담고 있다. 중국 시안엔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공장도 있다. 최근엔 시안2공장도 짓고 있다. 중국과 반도체 사업 관련해 이래저래 엮여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서 중국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미국 편에 노골적으로 서면 중국과 관계는 불편해질 가능성이 있다. 일부에선 'TSMC도 미국 손을 들어줬는데 삼성은 왜 못하냐'는 얘기를 할 수도 있다. 사실 TSMC와 삼성은 다르다. TSMC는 강력한 기술력을 갖춘 세계 1위 업체다. 비유하자면 '누구나, 알아서 찾아오는 맛집'이다. 중국을 조금 서운하게 했더라도 중국업체들이 당분간 TSMC를 대체하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TSMC가 중국 업체들과 '범 중화권'인 점을 내세워 단단한 네트워크를 구축해놨다는 평가도 있다.  

삼성전자는 다르다. 1분기 기준 시장점유율 15.9%로 세계 2위지만 1위 TSMC(54.1%)와 시장점유율 격차는 38.2%포인트에 달한다. 기술은 많이 따라잡아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서비스 수준은 아직 TSMC에 못미친다는 평가가 나온다. 게다가 파운드리사업부는 중국 업체들과 이제 막 안면을 트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노골적으로 미국 손을 들어주면 지금까지 닦아 놓은 중국 네트워크를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리쇼어링(해외 공장의 국내 복귀)을 독려하고 있는 한국 정부도 고려 사항이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만약 삼성전자가 미국에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하면 리쇼어링 정책과 거꾸로 가는 셈이 된다. 삼성전자가 작년 "2030년까지 130조원을 반도체 연구개발과 인력채용, 설비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할 정도로 국내 투자에 열성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해도, 기업 입장에선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게 경제계의 공통된 분석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끄는 주요 경영진. 왼쪽부터 백홍주 TSP총괄 부사장, 김기남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 이재용 부회장, 강인엽 시스템LSI사업부장 사장, 진교영 메모리사업부장 사장, 정은승 파운드리사업부장 사장. 한경DB


⑤ "후폭풍 만만치 않을 것"이란 삼성전자 관계자

"큰 위기에 직면했다." TSMC의 미국 공장 투자 소식을 들은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미국과 중국, 어느 한 시장도 버리기 힘든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 받고 있는 삼성전자의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사실 여러 고려요인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결국은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하거나 신설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최대 고객이 있는 국가의 대통령이 투자하라는 데 어떻게 거부하겠냐는 것이다. 관건은 삼성전자가 최대한 중국을 덜 자극하면서 미국 손을 들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반도체업계에선 삼성전자에 대한 동정론도 나온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지게 생겼다는 얘기다.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에 애꿎은 삼성전자만 타격을 받고 있다”며 “미국 요청을 뿌리칠 순 없겠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감안해 시기와 방법을 고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코로나19, 신제품 판매 부진, 검찰 수사 등으로 국내외 '복합위기'를 직면한 삼성전자에 또 하나 고민거리가 늘었다. 삼성전자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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