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에선 봉선화야"..72년 간 사무친 스승의 노래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2년 전, 전남 순천의 여순사건 위령탑 (최근 '여순항쟁 위령탑'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에 80대 할머니들의 합창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여순사건 70주년 위령제에 참석한 할머니들은 순천공립여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습니다. 여순사건 당시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겪은 할머니들의 증언은 기념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곱디고운 우리 선상님"
올해 87세 조정익 할머니가 기억하는 故 김생옥 선생님은 "참 고운" 청년이었습니다. 73년 전 순천공립여중학교에 입학한 갈래머리 정익이를 성악부로 이끈 건 바로 김생옥 선생님의 청아한 노랫소리였습니다. 제자들 모두 김생옥 선생님 하면 '자상한 선상님', '고운 선상님'이라고 회상합니다. 학교 관사 안에 함께 살았던 김 선생님 부인 또한 학생들을 여동생처럼 아꼈습니다.
그 이듬해 10월, 조정익 할머니는 평생 가슴을 후비는 끔찍한 사건을 마주합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순천 하늘에 총성이 울려 퍼진 어느 날, 김생옥 선생님이 사라진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학교 앞 죽도봉 골짜기에서 선생님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선생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죽도봉 골짜기에 울려 퍼진 노래 '울 밑에선 봉선화'...그리고 총성
故 김생옥 선생님(1918-1948)은 일본 동경 고등음악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성악가였습니다. 해방 직전 전라남도 광주 출신 피아니스트 박순이 씨와 결혼한 뒤, 전남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해방되자 교사의 길을 택했고, 목포고를 거쳐 47년에 순천공립여자중학교로 발령받아 오게 됐습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던 때, 김생옥 선생님은 광주 동방극장에서 음악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순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급히 순천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흙과 뒤엉킨 주검이 되어 아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김생옥 선생님이 끌려간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여순사건은 그랬습니다. 계엄령에 따라 진압군은 '좌익'으로 지목된 자를 즉결 처형했습니다. '좌익'으로 지목된 이웃과 친하면 그 사람도 '좌익'으로 몰려 처형당하던 때였습니다. 반군이나 좌익과 아무 관련 없는 민간인이 숱하게 살해됐습니다.
김 선생님이 총살당하기 직전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는 여기저기 회자했습니다. 김 선생의 요청인지 진압군의 명령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총살당하기 직전 김 선생님이 <울 밑에선 봉선화>를 불렀다는 겁니다. 노래 실력이 뛰어나 지휘관이 사형을 중지하라고 신호를 보냈는데, 정작 총구를 겨눴던 진압군은 이 신호를 오인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부모가 나눈 이야기를 몰래 들은 제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의 마지막 장면을 가슴에 삼키며 살아야 했습니다. 혹여 좌익으로, 빨갱이로 낙인찍힐까 쉬쉬했습니다.
■불타버린 학적부…70년 만의 '졸업 인증'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숨죽였던 소녀들은 다시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립니다. 전란에 학적부 일부가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당시 순천공립여중생 상당수가 졸업을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동창회는 해마다 거르지 않았습니다. 모임 때마다 나오는 옛이야기. 이야기 끝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눈시울을 붉히며 <울 밑에선 봉선화>를 불렀습니다.
일부 제자들은 故 김생옥 선생님의 부인 박순이 여사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27세 홀로된 박순이 여사(1921-1995)는 1952년 광주 사직동에 충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보기 시작했고, 이후 충현원 일을 제자들이 도우면서 다시 연이 닿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도, 남편을 잃은 유가족도 여순사건을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습니다.
故 김생옥 선생님의 사연이 알려진 건, 박순이 여사 임종 직전 얘기를 듣게 된 며느리로부텁니다. 시어머니가 일군 충현원을 끌어가고 있는 유혜량 원장이 시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해 각종 자료를 수집하면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 겁니다.
11명의 제자는 선생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전라남도교육청에 졸업 인증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70년 만에 공식적으로 졸업을 인증받게 됐습니다.
■처량한 봉선화…아직도 규명되지 못한 여순사건
김생옥 선생님처럼 이유 없이 희생된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는 1만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72년 동안 밝혀지지 못한 진실은, 갈래머리 여중생이 아흔을 바라보며 기억을 붙잡을 수 없듯이, 잊혀 가고 있습니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부모, 형제, 자식, 선생님, 친구를 잃은 유가족은 아직도 <울 밑에선 봉선화>처럼 처량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해정 기자 (beinghj@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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