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일본을 세탁하고 싶다"..앙숙 사쓰마-조슈번 손잡게 한 풍운아
번 버리고 낭인 자처..당대 양학자 가이슈 만나 해군·무역에 눈 떠
삼엄한 막부 순찰대 눈 피해 '反막부 전선' 삿초동맹 성사 이끌어
전쟁 승리 뒤엔 '근대국가플랜 원형' 고스란히 담긴 선중팔책 공개
료마 집안은 원래 부유한 상인 가문이었다.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하급 무사인 향사(鄕士) 신분을 얻었다. 신분은 낮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모르고 살았다. 5남매 중 막내였던 료마는 맏형과는 스무 살 차이였으니 친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세 살 터울 누나인 오토메와 단짝이었다. 얼마나 의지했는지 전국을 누비며 반(反)막부 활동을 할 때도 수시로 누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들은 우리가 료마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보물창고가 됐다. 페리가 왔을 때 료마는 때마침 검술을 배우러 에도에 유학 와 있었다. 료마는 서양 오랑캐의 목을 치겠노라며 큰소리쳤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년 넘는 에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료마는 도사번 최고의 난학자인 가와다 류조를 찾아갔다. 우리는 이 행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미 료마는 정신승리만으로는 서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풋워크(footwork) 의 경쾌함’이라는 료마의 특징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방향전환이다.
료마는 1862년에 탈번(脫藩)했다. 오늘날의 국적이탈에 버금가는 모험이다. 다른 번적(藩籍)을 얻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낭인이 된 것이다. 27세였다. 이해 에도에서 가쓰 가이슈를 만났다. 막부 측 인사 중 당대 최고의 양학자이면서 일본해군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가이슈를 만난 료마는 해군과 무역에 눈을 떴다. 바다의 주인이 세계를 제패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 무렵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일본을 한번 세탁해보고 싶다”고 썼다. 료마는 가이슈의 뜻을 이어받아 나가사키에 가메야마샤추(龜山社中)를 설립했다. 무역상사 같은 조직이다. 신분불문 인재영입, 무역장려, 외국어학습, 그리고 에조(지금의 홋카이도) 개척을 목표로 했다. 이는 나중에 도사번의 정식지원을 받아 유명한 가이엔타이(海援隊)로 발전하게 된다. 나가사키는 매력적인 냄새가 나는 곳이다. 도쿠가와 시대 전국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중국인이 거주했던 도시인 만큼 서양풍과 중국풍이 잘 섞인 도시다. 도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만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시가지가 잘 발달해 있다. 글로버 등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름잡던 서양 상인들도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 복잡한 도시에서 료마 일당은 암약할 수 있었다.
료마는 거대한 두 번인 사쓰마와 조슈가 손을 잡지 않고서는 막부타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런데 이 둘은 견원지간이다. ‘8·18정변’과 ‘금문의 변’에서는 서로 적군으로 싸웠다. 그만큼 불신도 깊었다. 먼저 신뢰부터 쌓아야 했다. 당시 막부의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조슈번에는 서양식 무기가 절실했다. 구입할 돈은 있었다. 다만 ‘금문의 변’으로 조적(朝敵)이 돼 활동이 제약돼 있었다. 하물며 서양무기 구입을 막부가 좌시할 리 없다. 이때 료마는 사쓰마를 설득했다. 사쓰마 명의로 무기를 구입해 조슈에 넘겨주자는 것이다. 조슈는 사쓰마가 그런 호의를 베풀 리 없다고 의심했지만 료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료마는 사쓰마 명의로 증기선(이름은 가고시마 앞 바다의 섬 이름을 따 사쿠라지마호로 했다)과 총포 등을 구입하고 조슈에 운반하는 일을 도맡았다. 그 사이에 양측의 신뢰도 쌓이게 됐다.
숙원을 달성한 료마는 가벼운 기분으로 교토 외곽의 여인숙 데라다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날 밤 막부 순찰대의 습격을 받는다. 료마를 예의주시하던 막부 측에 동선이 잡힌 것이다. 동료와 함께 큰일을 마친 여운을 즐기던 료마를 구해준 것은 데라다야의 여종업원 오료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욕조에서 피로를 풀던 오료는 바깥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료마에게 알렸다. 방에 있던 료마는 칼을 꺼낼 틈도 없이 기습당했다. 그를 살려준 것은 늘 품고 다니던 피스톨이었다. 사쓰마에서 히사미쓰에게 받은 것이다. 피스톨 방아쇠를 당겨 암살자 한 명을 쓰러뜨린 후 격투 끝에 데라다야에서 빠져나왔다. 오른손 검지가 잘려나갔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이 소식에 조슈의 기도, 조정의 이와쿠라 도모미도 기겁을 했다. 그러나 료마는 태연했다. 결국 목숨을 구해준 여인 오료와 결혼한다.
1866년 여름, 필사적으로 ‘근대화 개혁경쟁’을 하던 막부와 조슈가 마침내 충돌했다. ‘제2차 조슈 정벌전’이다. 이전에 정벌전이 한차례 있었으나 큰 전투 없이 끝났었다. 쇼군 이에모치는 오사카에 진을 치고 일왕의 칙허를 얻어냈다. 막부는 자기 병력과 다른 번의 군사력을 동원해 네 곳에서 진격해 들어갔다. 아무리 “숙연하기가 심야와 같이” 일치단결해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던 조슈번이라 할지라도 병력은 겨우 2만명. 상대는 막부 병력에다 다른 번 병력까지 가세해 수배에 달했다. 누구나 조슈의 멸망을 예상했다. 그러나 누구도 사쓰마가 이미 조슈 편으로 돌아선 것을 알지 못했다. 사쓰마의 지원을 확보한 조슈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막부군은 숫자는 많으나 무기 수준과 사기 면에서 조슈만 못했고, 다른 번들은 막부의 명령이라 동원은 됐으나 전의는 제로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바로미터는 사쓰마였다. 사쓰마가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 빠져나갈 구멍만 찾을 셈이었다. 우선은 움직였다. 아무도 이미 삿초동맹이 맺어졌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다.
놀라운 구상이다. 메이지 정부의 국시라 할 만한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가히 ‘일본 근대국가 플랜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그의 머릿속은 앞으로도 충돌할 사쓰마·조슈·막부를 잘 조화시켜 일본을 ‘세탁’할 구상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고생만 한 오료도 조금은 호강시켜줄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늘은 이 젊은이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료마는 그해 겨울 교토 숙소에서 다시 한 번 막부 순찰대의 공격을 받고 저항할 틈도 없이 즉사했다. 메이지유신을 알리는 궁중쿠데타 발발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때였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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