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문화' 확산.. 익숙했던 공동체 문화 재설정 과제로 [대한민국 신인간관계 보고서]

강구열 2020. 5. 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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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년간 짚어본 '신인간관계' / 혼밥·혼술 등 부정적 시선, 긍정 평가로 / 작년 가전품 시장서 소형가전 23% 성장 / "좋다, 나쁘다 보다 관계 맺는 방식 변화" / 기존 인간관계 형태·내용 큰 변화 시사 / '갑질'을 처벌하는 법률·제도 등장했지만 / 사회 구조 개선 등 근본적 대책 마련해야 / 한국에 터잡은 외국인, 이방인 취급 여전 / 내국인과 접촉 늘려 사회 관계망 형성을
#1. 지난달 24일, MBC의 예능프로그램 ‘나혼자 산다’가 7주년 특집으로 꾸민 방송을 내보냈다. “대한민국 1인 가구 453만 시대! 이제는 1인 가구가 대세!”라며 “싱글라이프에 대한 진솔한 모습, 지혜로운 삶의 노하우, 혼자 사는 삶의 철학 등에 대한 허심탄회한 스토리를 보여주겠다”는 기획 의도를 밝혔다. 취지에 맞는 내용인가와는 별개로 2013년 첫 방송 이후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우리 사회에 ‘나홀로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았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읽힌다.

#2. 지난 3월 자신이 살던 강원도 양양의 원룸 건물에 화재가 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건물에 들어가 10여명의 주민을 대피시킨 알리씨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였다.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그가 곧 한국을 떠나야 할 처지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체류기간이 연장됐다. 알리씨는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된 외국인 노동자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그들이 처한 현실이 여전히 팍팍함을 증명한다.
 
‘나홀로 문화’와 외국인 노동자, 접점을 찾기 힘들어 보이는 소재이지만 ‘관계’라는 화두를 적용하면 공통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한국인에게 나홀로 문화의 대두는 인간관계 형태와 내용의 큰 변화를 시사하면서 그간에 익숙했던 공동체 문화의 재설정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심하게는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관계 맺기를 원하는 수많은 이들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그간에 익숙했던 관계는 변화를 맞고 있고 실제 많은 것이 변하기도 했지만 ‘갑질’로 대표되는 낡고 부당한 관계의 악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다.

세계일보는 지난해 2월부터 연중기획 ‘대한민국 신인간관계 보고서’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해 있고,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새로운 관계와 그것의 의미를 전망하고 분석했다. 그 안에 포착된 것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이미 오래전 등장했으나 우리 스스로 외면했던 것도 있었다.

‘우리’를 강조하는 한국 문화에서 ‘나홀로 문화’는 낯선 게 사실이지만 새로운 관계 맺음의 형태로 이제는 일상의 풍경처럼 여겨진다. 혼밥은 나홀로 문화 확산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나홀로 문화’의 확산, 새로운 공동체의 대두

혼밥, 혼술, 혼행, 혼영… 나홀로족의 활동을 이르는 다양한 조어(造語)들이 여기저기서 애용된다. 이런 새로운 단어들이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홀로 문화에 대한 시선은 파편화된 인간관계, 공동체 가치의 붕괴, 집단주의에 대한 반작용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지나친 경쟁의식, 취업난, 경제난, 경직된 위계질서 등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가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려는 나홀로 문화 확산의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시선은 긍정적인 평가로 확연하게 대체되었고, 새로운 가능성의 한 분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변화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1코노미’란 말로 대표되는 경제분야다.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나홀로족의 양적 팽창이 확연해지면서 기업들이 이들을 타깃으로 한 각종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38조원 규모의 가전제품 시장에서 소형가전이 23% 정도의 성장세를 보인 것은 1인 가전제품 소비의 성장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좋다, 나쁘다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기준, 방식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시각도 강하다. 온라인을 통한 관계의 형성이 크게 증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데이팅앱으로 연애 상대를 찾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유튜브로 스터디를 하는 학생들이 있다. ‘인간관계 O2O’는 오프라인에서 필요한 인간관계를 온라인에서 찾아 해결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단어다.
나홀로 문화의 확산 속에서 한국 사회는 그간에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나고 있다. 대구대 박은아 교수(심리학)는 “공동체라는 것이 과거보다 훨씬 목적지향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두고 공동체의식의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지만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이전과 달라진 것이지 공동체적 가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형성된 강고한 형태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다.
가면을 쓴 대한항공 직원들과 시민들이 지난 2018년 5월 4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한진그룹 총수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을 규탄하고 경영 퇴진을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건강한 관계 멍들이는 ‘갑질’, 어떻게 뿌리뽑을까

한국 사회에서 ‘갑질’만큼 즉각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단어가 있을까. 부자라는 이유로, 지위가 높다고, 심지어 나이가 많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갑질은 관계를 기초로 한 건강한 질서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는다.

이른바 초엘리트라 불리는 이들의 특권의식에서 비롯되는 갑질은 그들이 가진 권력이 큰 만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다. 폭력, 폭언은 다반사이고 집안 경조사에 직원들을 동원하는 회사 오너, 대학원생을 하인 부리듯 하는 교수, 재판 관계자들에게 막말을 일삼는 판·검사, 선거 때 말고는 안하무인으로 일관하는 정치인…. 직장 선·후배, 손님과 직원 등의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갑질 또한 만연해 있다.

갑질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법률, 제도가 등장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감정노동자 보호법’, ‘공직자 윤리법’ 등이 새롭게 제정되거나 보완됐고 ‘갑질119’ 같은 기구들이 설치됐다. 이런 변화는 갑질을 하면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키우고, 갑질을 당한 이들이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점 등으로 긍정적인 변화라는 평가를 받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하다.

고려대 김윤태 교수(사회학)는 “우리나라는 소득의 집중도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다. 이런 불평등을 줄이는 조치가 필요하다”며 “부유층이나 대기업이 입법이나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조계원 연구교수는 “갑질을 가능하게 하는 기존의 관계를 벗어나려고 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 할 때 드는 비용이 상당히 높고 피해를 입고도 버틸 수밖에 없다”며 “기본소득, 실업수당,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을 통해 부당한 관계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투명성기구 유한범 사무총장은 “민간 영역에서 갑질 근절을 위한 대책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공정 경쟁을 위한 제도를 만들고, 필요하다면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8년 18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2018 세계 인종차별철폐의 날 공동행동에서 이주민과 난민 등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이재문기자
◆한국에 터잡은 외국인, 언제까지 이방인으로만…

8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를 기준으로 고용허가제에 따라 국내에서 일을 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수는 22만3000여명이다. 2018년을 기준으로 결혼이민자는 15만9000여명에 달하며 이들이 구성한 다문화가정의 가구원 수는 100만명이 넘는다. 한국에서 돈을 벌고 결혼생활을 하는 외국인들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며 어떤 부문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러나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당한다. 우리보다 가난한 국가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은 손쉽게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결혼이민자 10명 중 3명 정도가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현행 고용허가제는 노동자가 사업장을 선택할 수 없고 사업장 이동도 금지돼 있다”며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그 숫자가 상당수에 이르렀음에도 이들과의 제대로 된 관계 설정이 지금도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대구가톨릭대 다문화연구원 신난희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 등과는) 경제적 이해에 따라 만들어진 도구적 관계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그것을 뛰어넘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소수이자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법률, 제도를 확충해 가는 동시에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늘려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지적이 강하다.

전북대 설동훈 교수(사회학)는 “외국인들이 터무니없는 오명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게 문제”라며 “한국인과 외국인이 소통할 수 있는 수평적인 접촉의 기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최윤정 평등문화교육연구센터장은 “외국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 가장 좋은 것은 직접적인 접촉, 특히 개인적인 관계의 형성”이라고 강조했다.

강구열·박진영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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