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故 정해원이 남긴 세 가지 영웅담

김태석 2020. 5. 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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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故 정해원이 남긴 세 가지 영웅담

(베스트 일레븐)

지난 5월 1일 한국 축구계에는 생각지도 못한 비보가 전해졌다. 1980년대를 주름잡은 골잡이 정해원의 별세 소식이다.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 그리고 현역 시절 소속팀이었던 부산 아이파크는 일제히 그의 사망 소식을 전했으며, 그의 활약상을 기억하고 있는 많은 올드 팬과 지금의 축구팬들이 떠난 정해원을 추모했다.

지금처럼 미디어가 범람하지 않았던 1980년대에 활약한 인물이기에 그의 활약상이 지금의 축구팬들에게는 사실 체감하기는 힘든 게 현실이다. 하지만 정해원처럼 영웅 기질을 가진 화끈한 공격수는 찾기 힘들다. 당연히 다른 선수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영웅담도 존재한다. 그 영웅담을 소개한다. 또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위기에서 대표팀을 구한 골잡이

지금도 북한전은 경기 외적 이슈로 얼룩진다. 당연히 선수들에게는 쓸데없는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가중시킨다. 그런데 정해원이 활약했던 1980년대는 더욱 심했다. 분단 이후 한국과 북한 선수들이 피치에서 승부를 벌인 건 1978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이 사상 처음이다. 90분 내내 승부를 가리지 못해 양 팀의 공동 우승으로 마무리된 이 경기 직후 벌어진 시상식에서 한국 주장 김호곤이 이를 고깝게 본 북한 선수 김광일이 뒤에서 밀어버려 시상대에서 떨어진 일도 있었다. 요컨대 절대 져서는 안 될 경기가 바로 북한전이었다. 더욱이 그 시절에는 실력 차가 지금처럼 크게 벌어진 때도 아니었다.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경기였다. 여차하면 공동 우승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후 쿠웨이트에서 열린 1980 AFC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벌어진 북한전은 그렇지 않았다. 이기는 자만이 우승에 도전할 수 있었기에 두 팀은 사력을 다해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 19분 박종훈에게 내준 페널티킥으로 후반 중반까지 끌려가고 있었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에 북한에 패할 경우 선수들은 물론이고 축구계 전체가 타격 받을 가능성이 컸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1966 FIFA 잉글랜드 월드컵 아시아 예선 당시 한국이 예선에도 출전하지 않았던 이유가 당시 전성기였던 북한과 직접적인 맞대결, 정확히는 패배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에는 가볍게 흘릴 수 없는 이슈가 바로 북한전 패배였다.

요컨대 위기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때 한국 축구를 구한 선수가 당시 만 21세 연세대 공격수 정해원이었다. 정해원은 후반 35분 박스 안 우측에서 날아든 크로스를 골문 앞에서 감각적인 헤더슛으로 연결해 골망을 흔들었고, 후반 44분에는 왼쪽에서 넘어온 컷백을 박스 안에서 강렬한 왼발 슛으로 이어 두 번째 골을 만들어냈다. 벼랑 끝에 몰린 한국에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안긴 것이다. 대회 전만 해도 유망주에 불과했던 정해원이 전국구 스타로 거듭났던 계기였다.


전설의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

특정 선수가 한 경기에서 홀로 세 골 이상을 만들어낸 것을 말하는 해트트릭은 공격수들에게는 훈장과도 같다. 그리고 최고의 실력을 공인받은 골잡이는 대개 한두 번씩은 가지고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가진 ‘킬러’는 드물다. 아니, 한 손에 꼽아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대기록이다.

이 대기록을 정해원이 가지고 있다. 1986시즌 K리그에서 대우 로얄즈의 주장이자 간판 골잡이로 뛰었던 정해원은 1986년 10월 19일 대구에서 벌어진 유공 코끼리전에서 전반 7분, 전반 10분, 후반 6분에 세 골을 터뜨리며 대우의 4-3 승리를 주도하더니, 사흘 뒤 포항에서 벌어진 럭키금성 황소와 맞대결에서도 전반 36분, 후반 18분, 후반 39분에 세 골을 쏟아내며 대우의 5-1 대승을 이끌었다. K리그 역사상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은 이때가 유일하다. 정해원이 K리그 역사에서 손꼽을 만한 선수였다는 걸 증명하는 일화기도 하다.

당시 정해원은 국가대표로서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다. 왼쪽 날개 혹은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정해원은 많이 뛰지 않는다는 비판을 줄곧 받더니 1986년 국가대표팀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이해 1986 FIFA 멕시코 월드컵과 1986 서울 아시안게임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정해원이 느꼈을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 한을 K리그에서 풀었다. 정해원은 이해 총 10골을 넣어 득점왕에 등극했다. 물론 다시 대표팀에도 승선할 수 있었다. 1988 서울 올림픽과 1990 FIFA 이탈리아 월드컵을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다.


대우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

1980년대 대우는 현재 후신으로 남아있는 부산 아이파크와 달리 리그 내 위상이 압도적이었다. 시즌별로 성적의 등락 폭이 다소 크긴 했지만,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해 늘 강성한 전력을 뽐내던 팀이었다. 그 대우에 속한 선수 중 에이스가 바로 정해원이었다.

정해원은 K리그 통산 154경기에서 34골 11도움을 올렸다. 대우의 첫 우승을 이룬 1984년 정해원은 23경기에서 5골 4도움을 기록하며 득점과 도움 모두에 능한 면모를 보였다. 1987년에는 주장으로 활약하며 6골 4도움을 기록, 단짝 이태호, 당시 떠오르던 신예였던 김주성과 더불어 대우의 쌍포로 활약하며 팀의 두 번째 우승을 견인했다. 우승하지 못했지만, 앞서 언급한 1986시즌은 정해원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1987년에는 리그 MVP에 거머쥠은 물론 2년 연속 베스트 일레븐에도 이름을 올렸다. K리그가 출범한 직후 리그 내에서 가장 위력적인 골잡이 중 하나였고,

덕분에 대우는 K리그 초창기 역사의 지배자 중 하나로 군림할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부산이 여전히 명가였음을 인정받는 것 역시 정해원의 공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글=김태석 기자(ktsek77@soccerbest11.co.kr)
사진=베스트 일레븐 DB, 한국프로축구연맹 소셜미디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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