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의 지식카페>'도덕적 판단'은 편파적 속성.. 주류보다 비주류 흠결이 커보이는 이유

기자 2020. 4. 2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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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이철형 작가
우화를 통해 인간 세계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이야기꾼 이솝의 초상화. 게티이미지뱅크

■ 우화로 읽는 세상

김태환의 이야기철학 - ① 프로메테우스의 자루

이기적 인간의 충돌 막아주는 장치인 도덕… 다수가 평가하기에 모두가 판관이자 피고인

한국 정치, 과거엔 ‘비주류’진보가 도덕문제 발생땐 타격 커… 우열 바뀌며 이번 총선은 보수의 ‘도덕 공세’힘 못써

프로메테우스는 사람을 만들면서 두 개의 자루를 달아줬다. 앞에 단 자루에는 남의 악덕이 들어 있고, 등 뒤의 자루에는 나의 악덕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은 남의 결점은 즉각 알아보지만, 자신의 결점은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이솝우화는 쉽게 남을 탓하면서도 스스로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의 편향을 지적하는 이야기로서 “너는 어찌 네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는 유명한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와는 약간 어조의 차이가 있다. 예수의 질문이 나와 남에 대한 태도의 모순을 비판하며 준엄하게 자기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면, 이솝우화 ‘두 자루’는 인간이 왜 그렇게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신화적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 탓이다. 그렇다면 남의 결점을 잘 보고 자기 결점을 못 보는 것은 곧 인간의 본성이니 어떻게 고쳐볼 도리도 없을 것이다. 이른바 내로남불이 단순 유행어를 넘어 ‘시대정신’같이 돼버린 요즘이지만,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성향으로 보고 있었다면 우리의 현실을 특별히 이상한 것으로만 볼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는 왜 두 개의 자루를 똑같이 앞에 달거나 뒤에 달지 않고 각각 앞뒤로 놓은 것일까? 프로메테우스의 인간 설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그것은 설계상의 결함일까?

인간의 본성에 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인간이 대체로 이기적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이해관계는 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개인의 이기적 성향은 사회 속에서 다른 개인의 이기적 성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사회질서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상충하는 욕망을 잘 교통정리 함으로써 유지된다. 그 교통정리의 기제 가운데 하나가 도덕이다. 도덕은 개인에게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만을 위한 이익 추구 노력에 한계를 둘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도덕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받아들이는 원칙에 따라 개인의 이기심을 공정하고 적절하게 제어함으로써 이기적 욕망 사이의 충돌을 막고 사회가 어느 정도 조화롭게 유지되도록 해준다.

도덕의 제한과 근본적으로 제한을 알지 못하는 이기적 욕망의 갈등에서 악덕이 생겨난다. 도덕이 없다면 악덕도 없을 것이다. 도덕이 사회질서의 운용원리로서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도덕을 침해하는 행위는 징벌로써 통제하고, 도덕을 실천하는 행위는 장려해야 한다.

그런데 징계하거나 장려하는 행위는 도덕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원칙을 개별적 상황에 적용하고 이에 따라 개인을 규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다. 도덕이 법이 되면 법을 다루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소수의 전문가가 그 일을 해준다. 그러나 도덕에는 도덕의 실현을 위해 특화된 권위자가 따로 없다. 도덕에 관한 한 모두가 모두에 대한 판관이 된다. 재판관이 법에 근거해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징벌과 보상을 결정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도덕의 경우 징벌과 보상은 사회적, 집단적 메커니즘에 따라 간접적으로 이뤄진다. 즉 악덕이 타인에게 인식되면 이에 따라 나쁜 평판이 발생하고, 그 결과 사회적 소외를 겪는다. 반대로 미덕이 알려지면 좋은 평판을 누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이점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아무나 도덕의 판관이 될 수 있다면 그 판단은 과연 공정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누군가를 험담하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 속에서 불이익을 볼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마침 그 사람이 나의 경쟁자라면 그의 악덕을 밝히는 일은 내게 직접적으로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이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중상모략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그에게서 작은 악덕이라도 아주 예민하게 찾아내 험담을 퍼뜨리고 그의 사회적 평판을 낮추려는 경향이 있다.

동일한 원리에 따라 사람들이 굳이 자신의 악덕에 대해 예민하게 굴거나 자신의 평판에 해가 될 얘기를 퍼뜨리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성을 높이고 타인의 도덕성을 낮춤으로써 우리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의 판관은 근본적으로 비뚤어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비뚤어진 판관이라도 없으면 도덕은 이기심의 억제 장치로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반이기적인 사회적 장치로서의 도덕이 이기적 인간을 매개로 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이 의미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판관일 뿐만 아니라 모두가 피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의 악덕에 눈감아주는 것은 나뿐이다. 다수가 나를 바라보고 심판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평가가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반대로 내가 타인에 대한 판관의 위치에 서는 경우 나는 나 자신의 특수한 이해관계 때문에 편파적일 수 있지만, 나의 편파성은 다른 수많은 판관의 존재로 인해 희석된다. 한 인간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다수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판관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어느 정도 평판의 객관성이 유지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즉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한 개인에 대한 도덕적 평판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타인에게 엄격한 내로남불식 판단이 전혀 도덕적 판단으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단둘만이 서로에 대해 판관이자 피고로서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다. 이때는 나에 대한 나 자신의 판단과 타인의 판단이, 그리고 타인에 대한 나의 판단과 그 타인 스스로의 판단이 똑같은 비중으로 맞서면서 서로가 상대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편파적이라고 비난하는 대결 구도가 조성된다. 이 구도는 집단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한 사회가 두 개의 지배적인 정파적 집단으로 분열돼 있을 때, 모두가 자기 정파의 잘못을 보려 하지 않고 반대 진영의 잘못만을 캐려고 혈안이 돼 있을 때, 도덕은 특정 정파의 정치투쟁을 위한 이기적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 싸움에서 승자는 도덕적 우월성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어떤 집단이 더 영향력이 있느냐가 누가 더 도덕적이냐까지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한국의 정치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 도덕적 결함은 주로 진보에만 치명상이 된다든가, 진보는 도덕적 염결성을 늘 앞세워왔기 때문에 작은 도덕적 문제에도 쉽게 공격받고 정치적 타격을 입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도덕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불균형 문제를 진단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적 흐름을 보면 상황은 역전돼 진보보다 보수가 도덕적 공격 앞에서 훨씬 더 취약해진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진보가 보수에 비해 도덕적 문제로 쉽게 타격을 입었던 것은 진보가 보수와의 정치적 세력 관계에서 불리한 입장이었기 때문이고, 도덕성이 진보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라는 말은 그러한 상황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진보와 보수의 우열이 뒤바뀐 것이다. 진보를 향한 보수의 파상적 도덕성 공세가 이번 선거에서 큰 결실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변화한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이는 또한 양대 진영으로 거의 완벽하게 분점된 정치 지형에서 도덕성의 문제가 단순히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변수로 환원돼버릴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삼자적인 입장에서의 판단도 그 입장 자체가 소수로 머물러 있는 경우에는 결국 대립하는 두 진영의 어느 한쪽에 흡수되고 도구화돼버리고 만다. 그것이 최근 진보 내에서 도덕성의 문제로 자기 진영의 주류와 다른 입장을 낸 소수의 목소리가 겪은 운명이다.

편파적 도덕 판단의 메커니즘은 사회가 다수의 주류 집단과 소수의 비주류 집단으로 갈라질 때 더욱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다수 주류 집단의 관점에서 소수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도덕적 흠결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보다 더 크게 보인다. 따라서 주류 집단이 도덕적 판관으로서 패권을 행사하는 한, 소수 비주류 집단의 사회적 평판은 현저하게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메커니즘이 얼마나 심각한 해악을 가져왔는지는 유대인 박해의 역사가 극적으로 보여준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문제는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왜 이렇게 인간을 결함이 많도록 설계한 것일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도덕 판단의 편파성은 인간 이기심의 발로일 따름이다.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기심을 제어하는 장치인 도덕 역시 인간에 의해 이기적 동기에서 도구화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지, 프로메테우스의 괴상한 농간으로 인간의 도덕 판단이 흐려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저 우화는 도덕적 판단의 편파성 기원을 설명하고 이를 체념적으로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편파성을 기이하게 비꼬는 풍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두 자루에 현혹돼 세상의 반쪽만 보고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나와 남을 모두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우화의 메시지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용어설명

이솝우화: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전쟁 포로이자 이야기꾼 이솝(AESOP·그리스어 이름 AISOPOS의 영어식 이름)의 우화 모음집. 이솝은 트라케 또는 프리기아 출신 전쟁 포로로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사모스 사람 이드몬의 노예로 일하다가 훗날 아폴론 신전 사제들의 탐욕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그곳 사람들에게 살해됐다고 한다. ‘이솝우화’는 그리스 신들을 비롯해 동물, 인간, 나무나 태양 같은 자연을 등장시켜 인간사를 풍자하는데 약육강식의 냉혹한 현실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이유로 기독교 윤리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목록에서 빠지거나 첨가돼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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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법학, 독문학을 공부했다.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대에서 그레마스 기호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야기 이론을 비롯해 문학이론 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있으며, 저서로 ‘푸른 장미를 찾아서’(문학비평집), ‘문학의 질서-현대 문학이론의 문제들’ ‘미로의 구조-카프카 소설에서의 자아와 타자’ ‘우화의 서사학-40가지 테마로 읽는 이솝우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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