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간병 여성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멈춰 있을 것"

입력 2020. 3. 28. 11:46 수정 2020. 3. 2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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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18. 코로나19가 드러낸 돌봄·간호의 가치

독일 남녀 임금격차는 21%
매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오후 3시24분 파업·침묵시위

독일 언론, 코로나19 이후
간호·돌봄 인력 중요성 부각
정부, 돌봄 인력 지원법 시행
2019년 3월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 참가한 한 여성이 ‘성별 임금격차 철폐’라고 쓴 문구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여성 파업 베를린 지부 제공

“간호사는 미디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간호사가 단순히 의사를 보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여러 책임을 지는 의료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간호사의 실제 업무와 의료인이 병원에서 직면하는 어려움을 전하고자 한다.”

최근 오스트리아의 한 간호사가 인스타그램(@frauschwester_) 계정을 열고 코로나19 발생 이후 병원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알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간호 인력 부족으로 모든 병원이 어려움을 겪으며 간호사들이 초과근무에 시달린다고 그는 전했다. 보호 장비와 소독제가 배송되는 과정에서 도난을 당해 의료인의 장갑과 마스크 교체 횟수가 줄어드는 일도 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간호사를 천직으로 여긴 그는 다른 직업을 고민하지 않고 바로 간호사 직업 훈련을 시작했지만 첫날부터 엄혹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일손이 부족한 의료 현장에서 환자 30명을 혼자서 돌보기도 하고, 병실 바닥과 의료 장비, 침대 청소 등 간호 외 업무를 맡기도 했다. 신체 접촉을 당하거나 욕설, 성적 모욕을 듣는 것은 일상이고 치매 환자를 돌보던 중 구타를 당해 크게 다치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병원 쪽에 이야기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든 걸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넘쳐나는 일을 해야 했다. 그의 게시글은 간호 업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 나은 노동조건을 보장해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 50여개국에서 세계 여성의 날인 3월8일에 ‘여성 파업’이 벌어진다. 2019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 참여한 베를린 지부 회원들 모습. 채혜원 제공

‘선한 일’이지만 먹고살기 버겁다

유럽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간호·돌봄 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다. 독일 연방고용청 자료에 따르면, 간호사·간병인의 80%, 노인 돌봄 종사자의 84%,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보육교사 중 94%가 여성이다.

간호·돌봄 영역의 노동 환경 개선은 ‘여성 파업’(Frauen Streik)의 주된 테마이기도 하다. 세계 여성의 날인 3월8일, 세계 50여개국에서 여성들은 오후 3시24분부터 일터를 떠난다.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도 임금을 적게 받는 ‘성별 임금격차’로 인해 여성들이 무보수로 일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파업을 벌이는 것이다. 1991년 성별 임금격차가 18.3%인 스위스에서 첫번째 여성 파업이 조직됐다. 독일에서는 이날 많은 여성들이 길거리로 나와 ‘나는 파업 중이다’란 문구를 의자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한다.

지난해 ‘여성 파업’ 베를린 지부는 간호사, 간병인, 보육교사 등과 함께 간호·돌봄 영역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 문제에 대해 알렸다. 예를 들어 시위에 함께 참여한 ‘샤리테 체에프엠(CFM)’ 직원들은 베를린 샤리테대학병원의 의료기구 살균, 환자 수송, 병원 소독 및 청소 등 주요 업무를 맡고 있는데도 시급은 11유로(약 1만4천원)에 불과했다. 베를린 지부 회원들은 성명서를 내어 “이들은 사회적인 인정과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선한 일’을 하고 있지만, ‘선한 일’이라는 인식은 노동자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며 “앞으로 간호·돌봄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과 평가절하에 대항해 투쟁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 베아트리스 프라즐은 ‘코로나19는 페미니즘 이슈’임을 지적하며 돌봄 노동자의 임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온라인 매거진 <에디션 에프>(EDITION F)에 기고한 글에서 “지금처럼 학교와 유치원이 문을 닫으면 책임감을 느껴 일터로 가지 못한 채 아이를 돌보거나 재택근무할 때 보육과 집안일을 담당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자가격리 때 돌봄과 간병 업무를 떠안은 여성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그대로 멈춰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라즐의 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가정 방문 돌봄 복지사의 92.2%, 병원과 같은 입원 형태의 돌봄 서비스를 맡고 있는 종사자의 85.8%가 여성이라고 한다. 코로나19로 돌봄과 간호에 대한 사회적 가치가 명확해진 지금, 이 근로자의 처우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프라즐의 주장이다. ‘주 35시간 노동 시간 보장’ ‘더 나은 임금 보상’ ‘성별에 치우치지 않은 업무 배분’ 등을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했다.

코로나19로 독일도 위기상황에 놓이면서 평소보다 뉴스를 더 자주 챙겨 보는데 독일 언론은 한국에 비해 간호·돌봄 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속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한 예로 지난 23일, 독일 공영방송 <체트데에프>(ZDF)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사회 시스템이 유지되는 데 주요한 직업군에 대한 자료를 발표했다. 예상대로 ‘의료·간병 인력’ ‘보육교사’ ‘노인 돌봄 인력’ ‘의료 보조원(혈액 검사, 환자 문서 관리, 처방전 발행 등의 업무 수행)’ ‘약사 보조원’ 등 대부분 간호·돌봄 영역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프라즐 기자의 지적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을까.

3월18일 독일 ‘동일임금의 날’ 캠페인을 위해 만들어진 에코백 이미지. 독일의 성별 임금격차는 21%다. 남녀가 똑같이 일하고도 365일 가운데 약 77일은 여성이 무보수로 일하는 셈이다. 이에 독일은 한해가 시작된 뒤 77일이 지난 시점인 3월18일을 ‘동일임금의 날’로 정했다. 전문직여성 독일연맹 제공

매일 밤 9시 의료·간병인에게 박수를

간호·돌봄 영역 구조 개선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주요 열쇠이기도 하다. 소위 여성 영역으로 여겨지는 산업과 직군의 임금이 낮은 ‘성별 임금격차’가 전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성별 임금격차는 21%로, 유럽 평균인 16%보다 높다. 남녀가 똑같이 일하고도 365일 중 약 77일은 여성이 무보수로 일하는 셈이다. 이에 독일은 한해가 시작된 뒤 77일이 지난 시점인 3월18일을 ‘동일임금의 날’(Equal Pay Day)로 정하고 관련 영화 상영, 거리 캠페인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전문직여성(BPW) 독일연맹이 2008년부터 이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연방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가 후원한다.

이 밖에도 독일 정부는 간호·돌봄 영역 구조 개혁을 위해 올해부터 ‘돌봄 인력 지원법’(Pflegeberufegesetz)을 시행 중이다. 새 법안은 기존에 분리되었던 노인 돌봄과 의료·간호 교육 과정을 통합하고, 근로 여건을 개선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법 개정에 따라 약 14만명에 이르는 교육생들은 3년간 교육과정을 이수하며, 등록금을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연수 기간 중 훈련수당도 받을 수 있다. 직업교육을 받으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전체에서 자격을 인정받는 것도 특징이다. 이 법안으로 얼마만큼 돌봄 영역 노동자들의 처우가 나아질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법안을 개정해 구조를 바꿔나가려는 시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 보인다.

요즘 베를린에서는 시민들이 매일 밤 9시, 고생하는 의료·간병인들을 위해 박수와 함께 ‘고마워요!’(Danke schön!)라고 외치는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이처럼 시민들이 스스로 방역 주체로서 정부 권고 사항을 지키며 의료인들을 지지하고 있을 때, 정부와 의회는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의료인 및 간병인이 제대로 된 근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법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간호·돌봄 영역의 구조 개혁 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도 이뤄낼 수 없다. 코로나19가 던진 또 하나의 과제다.

▶채혜원: 한국에서 여성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와 젠더 이슈를 전한다. 격주 연재.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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