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의 복간.. "내가 아직 살아있어 다시 조선일보를 보네"

이한수 기자 2020. 3. 25.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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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22] 1945년 11월 23일, 복간
1940년 일제 탄압에 강제 폐간.. 광복 후 신문 한장으로 새 출발
이승만·김구·여운형·안재홍 등 당대 주요 인사들의 축사 실어
"한용운·문일평·이관용.. 죽은 친구들이 어른거린다"

1945년 광복 후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조선일보 마크가 인쇄된 원고지를 앞에 놓고 앉았다. 1928년부터 11년간 '임꺽정'을 연재했던 신문이 1940년 8월 강제 폐간으로 사라졌다가 5년여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홍명희는 감격에 겨워 펜을 들었다.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다시 살아나오는 조선일보에 축사를 부치려고 눈에 익은 조선일보 마아크 박힌 원고지를 앞에 놓고 앉으니 전날 조선일보에 투고하라고 조르던 호암(湖岩·문일평), 일성(一星·이관용), 소설란을 같이 채우던 만해(萬海·한용운) 이런 죽은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생각이 감상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1945년 11월 23일 자로 조선일보가 복간된 후 사장 방응모(가운데 한복 입은 이)가 의정부 자택 뒤뜰에서 사원들과 함께 잔치를 열어 자축했다. /조선일보 DB

홍명희가 쓴 축하글은 1945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 복간호에 실렸다. 강제 폐간 후 5년 3개월 13일. 해방 후 3개월 8일 만에 다시 태어난 신문이었다. 독립한 새 나라를 세울 정치 지도자들도 잇달아 조선일보 복간을 축하했다. 한 달여 전 미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조선일보가 왜적의 압박 밑에서도 개명과 국권의 회복을 위하야 분투항전한 지 다년(多年)에 그 공효(功效)가 얼마침 다대(多大)함을 민중이 각오하고 애호하든 것인데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간하기에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끓게 통념히 여겨온 바"라면서 "금일 우리의 위급한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다시 부활한 면목으로 출세(出世)됨을 우리는 한없이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축하했다. 임정 주석 김구는 요인들과 함께 환국한 이튿날인 24일 '朝鮮日報'(조선일보)라는 제호 글씨와 함께 '有志者 事竟成'(유지자 사경성)이란 휘호를 썼다.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유명 인사들의 복간 축하는 24~26일 계속 이어졌다. 조선인민당을 창당한 여운형은 "우리 민족문화 육성에 막대한 공헌을 하여온 조선일보가 이번 속간(續刊)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여간 반가웁게 생각지 않는다"면서 "과거의 빛나던 그 민족문화사상에 남긴 공적과 역할을 다시 살려서 바야흐로 닥쳐오는 신국가 건설 도정의 훌륭한 초석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한국민주당 송진우는 "조선일보와 나는 개인적으로도 폐간 당시에 동업(同業) 관계였던 만큼 총독부로부터 똑같이 폐간 선언을 받던 그 당시를 생각할 때 감개무량한 바가 있다"며 "자주독립 촉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조선 문화에 많은 공헌이 있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고 축하했다.

조선일보가 일제의 탄압으로 고통을 겪고 강제 폐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해방 당시 좌우를 막론하고 당대 인사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공산당 이관술은 "일본 제국주의의 철쇄(鐵鎖·쇠사슬)에 얽매이었던 조선일보가 다시 나오게 된 것은 귀보(貴報)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방금(方今·이제) 조선이 모든 반역자를 박멸(撲滅)하고 단연코 민족을 통일하여야 할 중대한 현 단계에 있어서 조선일보가 전통 있는 그 본령을 충분히 발휘할 것으로 크게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고 적었다. 국민당 안재홍은 "(조선일보가)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절식(絶息·숨이 끊어짐)되었었고 이제 조선민족에게 약속된 해방과 함께 또다시 그 보도와 비판 및 선양의 기관으로서 신출발(新出發)을 하게 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썼다.

해방 직후에 신생 신문 20여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들은 기존 인쇄시설을 장악하고 대부분 좌익 논조를 펼쳤다. 조선일보는 서울신문(매일신보가 제호를 바꿈) 시설을 빌려 타블로이드판 1장(2면)짜리 복간호를 냈다. 빈약하지만 5년여간 숨이 끊어졌던 신문의 부활이었다. 조선일보는 실낱같은 생명을 이어 이날부터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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