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시절에 고함
불안 앞에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당신과 나 사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제법 그럴듯한 캠페인도 한 몫하지만, 어려운 시절에도 목련은 피고 사랑은 계속되지. 때때로 불안은 성장통이 된다. 우리는 생의 예측불가능한 어떤 불안을 딛고서도 끝끝내 당신을 원하고 변치않는 마음을 지켜낸다.
백화점 가서 명품을 사도 부러우면 지는거야! 자랑할 친구가 필요하고, 근사한 미술관 아름다운 예술도 보고 느끼고 누려줄 당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라도 나를 봐줄 한사람, 당신이 필요하다. 평상시에 사회적 거리는 마치 지하철 옆자리 혹은 앞자리. 초연결 시대에 살며 우리는 몹시 가까이에 있었다(고 느꼈다). 너무 가까워 관계의 허술함도 느끼지 못했다. 당신과 나. 이토록 가까운데, 금방이라도 달려가 볼 수 있는데.
불안해지자 극도의 이기가 나오며 자기본위대로 행동한다. 생존 앞에 뭣이 중헌디. 뭣이 중하냐고. (마스크가 젤 중요한 시대라니!) 핑계도 당당하다. 집에 라면박스가 쌓이고 휘청휘청 불안도 쌓인다. 나는 최소한의 외출과 행동만을 남기고 악마의 창궐인 양 움츠러 숨는다. 마스크 속에 삶을 감추고 더이상 당신의 안부도 묻지 않는다. 당신과 나 사이. 아득한 거리가 어둔 숲처럼 드러난다. 부지런히 오가던 오솔길 하나 그새 보이질 않아. 구태여 애써 찾지 않는다. 다시 길을 낼 의지도 내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을까. 사회적 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안녕같구나.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시절을 탓한다.
마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든 관계의 중심은 나. 나의 안위와 피로앞에 사랑은 아득해지고 관계는 허약해졌다. 나만 아니면 돼. 가 통하지 않는다. 나 아닌 불특정 다수 모두를 경계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어쩌면 나만 아니면 돼.가 부른 참극일수도 있다. 점점 각박해지는 내가 밉고 자꾸만 누군가 탓을 하고 싶다. 보편적 인류애가 필요하고 따뜻한 인간애의 회복이 절실하다.
마음을 잔뜩 옹송그린 채 예술의 전당에 갔다. <모네에서 세잔까지>. 고전들의 다소 지루함을 각오했으나 오래된 명작들은 언제나 답을 알고 있지. 광활한 전시를 혼자 누리겠거니 했는데 깜짝 놀랐다. 한산하던 로비와 달리 전시장은 사람들이 퍽 많았다. 그렇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와 회복의 시간, 그리고 당신. 마스크 속으로 다정을 속삭이며 모네의 연못과 서로의 눈빛을 번갈아 응시하는 커플들이 유독 많았다. 꼭 잡은 손도 놓지 않았다. 그래, 사랑은 지지않는 것이로구나. 그깟 불안에, 한갓 바이러스에, 오지 않은 미래에.
모네와 고갱을 지나쳐 낯선 이름과 작품을 오래 오래 들여다봤다. 가만히 이름을 읊조렸다. 차일드 하삼의 <여름 햇빛>. 바닷가에서 풍성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책을 읽는 여인의 그림이다. 여름 햇살이 아득히 쏟아져 내리는데 나른하게 바위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다. 바위 옆 레이스 달린 양산을 펴도 좋으련만 그 순간 햇빛은 찬란한 사랑처럼 쏟아져 하릴없다. 드넓은 바다도 저 멀리 아득할 뿐 무아지경이다. 붉어진 뺨, 벌어진 입술, 책이 너무 재미있거나 사랑에 흠뻑 빠져있거나. 여름 햇빛처럼 내 모든 생이 한 때여도 충분할 것 같다.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의 <꽃이 핀 사과나무> 아래 잠시 머물렀다. 하얗게 빛나던 사과꽃이 마악 투둑, 떨어져 내리고 있다. 그 아래 염소를 풀어논 채 농부는 주저앉아 버렸다. 한시절 뜨겁게 피어났던 사랑이 지고 있다. 그 처연함이 빛나서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은 가없이 혼곤하다. 그 해 뜨거웠던 지중해의 햇살도 난데없이 불어젖히던 먼 산맥의 바람도 분분한 낙화보다 아름답지 않았으리. 아주 오래도록 날이 저물도록 지켜볼 것이다. 꽃이 지는 풍경 그리고 사랑이 떠나는 뒷모습.
불안 앞에 다시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사랑과 사랑 사이, 당신과 나 사이. 마음은 이기의 강을 건너 당신의 강에 닿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을테고 답싹 손 잡을테지. 나는 지금 강 중간 어디쯤. 차근 차근 한걸음씩 내딛어 끝끝내 당신에게 간다.
[임지영 나라갤러리 대표/ <봄말고 그림>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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