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2등 신민으로 몰린 소년시절.. 조선일보 보며 나라 잃은 아픔 읽어"

백선엽 장군 2020. 3. 6.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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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선일보] [6] 백선엽
"한글지면 통해 민족의 얼 깨우쳐.. 암울한 시대를 보여준 窓이었다"

내 소년 시절인 1930년대 초반은 한국인 모두에게 암울했다. 나라를 빼앗긴 지 벌써 20년이 더 흐른 때였다. 나는 그 무렵 평양 시내에 있는 부립(府立) 도서관에 자주 앉아 있었다. 또래 소년들과는 달리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언제나 학교가 파한 뒤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평양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고자 했던 당시 고교 졸업생 이상 청년들과 나는 도서관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들은 주로 값이 비싸 제 돈으로 사기 어려운 의학 관련 서적들을 뒤적였다. 나는 그 청년들 틈에 섞여 신문을 열심히 읽었다.

내 시선을 끌었던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우리글로 쓰인 조선일보라는 '창(窓)'을 통해 나는 식민지 조선의 구석구석을 읽었다. 조선일보 지면의 기사 행간에는 우리가 나라를 왜 빼앗겼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조심스럽게 얹혀 있었다. 그 지면을 통해 나는 우리말의 정확한 쓰임새를 익혔고, 나라 잃은 선대(先代)의 울분과 그를 극복하려는 의지도 읽었다. 일본의 통치하에 2등 신민(臣民)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조선일보를 통해 조용히 우리 민족의 얼을 깨칠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중학교 때부터 조선일보를 읽었다”며 “신문은 내게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었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말 본지 특별 기획 ‘문무 100년의 대화’를 위한 인터뷰 모습. /오종찬 기자

1945년 해방 뒤 나는 만주군 생활을 청산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동향(同鄕) 대선배였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비서로 잠시 일했다. 그는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민족주의 진영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1945년 12월 말 나는 월남했다.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소련을 등에 업고 차츰 권력을 쥐어갈 때였다. 월남에 나서기 전 나는 고당 선생께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지 마시고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자"고 권유했다. 그때 조만식 선생께서는 "나마저 내려가면 이 북녘의 동포들은 어쩌란 말이냐"며 단연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민족을 향한 고당 선생의 한없는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발길을 남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소년 시절 도서관에서 읽던 조선일보의 이미지는 늘 고당 조만식 선생의 의연했던 모습과 겹쳤다.

6·25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서 찾아온 4·19와 5·16, 그리고 그 뒤의 산업화를 통한 대한민국 발전의 역정 속에서 나는 변함없는 조선일보 애독자였다. 대사로 10년 정도 해외에서 머물 때 조선일보를 읽지 못했던 갈증은 귀국 뒤 조선일보를 늘 곁에 두고 들여다보면서 풀었다.

조선일보 칼럼은 특히 사세(事勢)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로 끊임없는 각성을 던지곤 했다.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내용이 조선일보 지면에는 퍽 풍부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매력은 나라 잃은 설움을 체험한 우리 세대에게 잘살아서 강고한 국방력을 갖추자는 '부국강병(富國强兵)', 언제 닥칠지 모를 위기를 늘 생각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또 일으켜 세운 우리 세대의 어감으로는 딱 그렇다.

힘이 부족하면 남에게 침략을 당하는 법이다. 전쟁을 도발했던 북한이 아직 여세(餘勢)를 거두지 않고 있고, 지정학적으로는 주요 강대국에 싸여 항상 불안한 위치에 놓이기 마련인 대한민국은 늘 그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라를 일제(日帝)에 빼앗긴 뒤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 출범한 조선일보가 지금까지 유지해 온 옳고 곧은 방향을 결코 잃지 않기 바란다.

☞백선엽 장군

6·25전쟁 최고의 영웅이다. 다부동 전투 등 전쟁의 국면을 좌우했던 주요한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에 나서 가장 처음 평양에 발을 들여놨고, 빨치산 토벌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터졌을 때 대령이었던 그는 1950년 7월 준장이 됐고, 2년 반 만인 1953년 1월 우리 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해방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 목숨을 구한 일화도 유명하다. 1920년생으로 올해 만 100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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