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당전쟁 현장중계2 ·요동성 전투

임기환 입력 2020. 3. 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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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91] 5월 2일,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적, 이도종의 군대가 요동성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당태종의 본군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5월 5일, 당태종의 본군은 이틀 만에 요택을 지났다. 이제 요하를 건너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저항은 없었다.

5월 8일, 신성과 국내성에서 동원된 고구려 군사 4만명이 이적과 이도종의 당군을 배후에서 압박하였다.

앞서 당군이 개모성을 함락하여 신성으로부터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제압하였는데, 요동성에 나타난 고구려군은 이와는 다른 경로로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도착한 듯하다. 당군의 선발대를 이끄는 이적과 이도종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이들 선발 군대의 주된 임무는 당태종이 요동성에 도착하기 이전에 당태종의 요하 도하 및 이동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동시에 주변 고구려성으로부터 구원을 차단하여 요동성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적과 이도종은 당태종의 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고구려 구원군을 제압해야만 했다. 물론 고구려군 수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도랑을 파고 성채를 갖추어 당태종 본군의 기다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도종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나라 측 기록에는 이도종이 기병 4000기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고구려군과 맞섰으며, 이적의 군대가 뒤를 받쳐 공격해 고구려군 1000여 명을 전사시키면서 구원군을 격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전투 이후 고구려 구원군의 동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기록대로 고구려군 1000여 명이 전사하고 일부 군사가 패전으로 흩어졌다고 하더라도 본래 군사가 4만명이라고 한다면 패전 이후에도 적지 않은 수의 고구려 군사가 여전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터인데, 이후 당군의 요동성 총공격 때에도 이들 구원군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당태종이 요동성에 도착한 직후에 구원군의 격퇴에 공을 세운 이도종과 마문거를 포상하고, 군사를 후퇴시킨 행군총관 장군예를 사형에 처한 것을 보면 당시 치렀던 전투가 결코 간단하지 않았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면 결코 궤멸한 상태가 아님이 분명한 고구려 구원군 수만 명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이렇듯 당나라 측 기록을 보면 의구심이 남거나 합리적인 설명이 어려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고구려 자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음이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요동성 전투만이 아니다. 이후 백암성 전투, 안시성 전투 때에도 고구려 구원군의 행보는 납득할 수 없는 면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5월 10일, 요하를 건넌 당태종 본군이 요동성에 이르러 마수산(馬首山)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요동성 일대에 도착자마자 당태종은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요동성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 나섰다. 그때 요동성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메우기 위해 흙더미를 지고 나르는 병사들을 보고 당태종 자신이 직접 말에다 흙더미를 지어 나름으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요동성의 해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길. 물길 왼쪽이 성안이다. /사진=필자

당태종이 이끄는 본군의 도착으로 전력이 몇 배나 강화된 당군은 요동성에 대해 밤낮으로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당군은 출정 이전부터 최신 공성무기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1리 밖에서 300근의 돌을 날리는 최신형 포차가 대표적이다. 이적이 포차를 나란히 세우고 일제히 큰 돌을 날려 요동성 성벽을 무너뜨렸다. 고구려군은 무너진 성벽 위에 나무를 쌓고 끈으로 그물을 엮어 묶어서 마치 누각처럼 만들어 날아오는 포차 돌에 맞섰다. 그러자 당군이 당차(撞車)를 동원하여 성벽 위의 나무성벽을 부수면서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방전이 밤낮없이 7일여 동안 계속되었다.

5월 17일, 요동성의 함락이 눈앞에 있다고 판단한 당태종은 직접 철갑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이적과 요동성 아래에서 만나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마침 거센 남풍이 불어오자 당군은 화공을 시작하여 요동성 위에 나무로 구축한 방어시설을 불태우고, 포차로 돌을 날려 성벽을 파괴하였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요동성도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당군 측 기록에서는 그 전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군 전사자 1만여 명, 포로가 된 고구려군사 1만여 명, 주민 4만명, 곡식 50만석, 이외 다량의 가축이었다.

5월 2일부터 이적의 선발대가 요동성을 포위한 지 16일째, 당태종이 본대를 이끌고 직접 총공격을 지휘한 지 7일째였다. 요동성 2만명의 군사와 4만명의 주민이 16만명이 넘는 당의 최정예 대군과 치열하게 맞서 싸운 결과였다. 비록 성은 함락되었지만 양군의 전력 차이를 고려하면 결코 패배라고 할 수 없는 격전이었다.

당태종은 정주를 출발하면서 요동성에서 승리하면 정주까지 봉화를 올리겠다고 세자에게 약속하였다. 그래서 정주로부터 동쪽으로 수십 리마다 봉화대를 세워 요동성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5월 17일 이날 당태종은 요동성 함락이 눈앞에 오자 승전 소식을 세자에게 전하기 위해 봉화를 올리게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고 이틀 후인 19일에 당태종은 승리의 조서를 내렸다. 그 조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지금 이 승리는 하늘의 경사이니 마땅히 사방에 반포하게 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이런 몇몇 사실만 보아도 당태종이 요동성 공격에서 수양제의 전철을 밞을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요동성 공략은 단지 고구려 방어망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전술적인 승리 정도가 아니었다. 수양제가 백만대군으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당시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은 상처를 극복하고 고구려 정벌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큰 상징성을 갖는 것이었다.

요동성은 고구려 요하선 방어체계에서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성이었다. 북으로 개모성에서 신성으로 연결되고 남으로 안시성, 건안성으로 연결되는 최전선의 중심 고리이며, 교통로상으로는 태자하를 따라 동쪽의 백암성을 거쳐 오골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입구를 막는 요충성이었다. 따라서 요동성의 함락을 고구려 방어체계의 일부가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구려로서도 끝까지 요동성을 지켜냈던 수양제의 침공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방어체계를 가동해야 했다.

1차 접전에서는 일단 당군이 승리를 거둔 셈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논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당군은 고구려 땅에서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내디딘 데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 사실을 당태종도, 당군의 그 어느 누구도 몰랐을 뿐이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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