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인 팬 "핑크는 우리 색인데".. 중장년 팬들도 색깔 전쟁
아이돌 팬덤.. 색깔의 사회학

"우리가 죄지었나요? 핑크는 '어게인'이 먼저입니다. 바꾸려면 그쪽 당이 변경해야죠." "우리 색을 도용당했는데 대책 없나요."
지난 17일 가수 송가인의 팬 카페 '어게인'이 때아닌 '색깔 논쟁'으로 달아올랐다. 이날 출범식을 가진 미래통합당이 상징 색으로 핑크를 내세운 게 발단이었다. 미래통합당은 이 핑크를 '해피핑크'로 명명했다.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색'이란 의미를 담은 작명이었다.
방탄소년단 팬 클럽 '아미'의 시니어 버전이라 할 만큼 엄청난 팬덤으로 똘똘 뭉친 '송가인 어게인'이 발끈했다. 어게인이 상징 색으로 삼은 핫핑크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송가인 팬들에게 숟가락 얹으려는 것 아니냐"는 반응에 미래통합당은 "송가인 팬만 쓸 수 있는 색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아이돌 팬들끼리 색깔 전쟁을 치른 적은 종종 있었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상징 색을 둘러싼 충돌이 일어난 것은 이례적이다. 10~20대 아이돌 팬이 아닌 중장년 팬이 '색깔 영토 분쟁'에 뛰어든 것도 새로운 현상. 팬덤을 만나 더욱 강력해진 색의 세계를 살펴봤다.
아미들, 보라해
"아미들, 사랑하고 '보라'합니다." 지난 연말 멜론뮤직어워드(MMA)에서 방탄소년단이 인기상부터 대상까지 8개 부문 상을 휩쓴 뒤 멤버 뷔가 소감을 말했다. '보라? 뭘 보라고?'라고 생각한다면 '아미'를 '군대'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라는 방탄소년단과 아미를 상징하는 색. 2016년 뷔가 팬 미팅에서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에서 보라색이 마지막이다. 보라색은 상대방을 믿고 서로 오랫동안 사랑하자는 의미 같다"고 한 게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사전에도 안 나오는 '보라한다'는 말이 아미의 세계에선 '사랑한다'는 뜻으로 통했다. 글로벌 스타답게 영어 버전도 있다. "I purple you." 컬러가 팬덤을 만나 신조어까지 낳았다.
팬덤에서 색깔이 왜 이토록 중요해졌을까.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를 매일 만날 수는 없다. 계속 의미 부여를 해야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컬러 코드'다. 굿즈를 사서 의미 부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색깔이 스타와 내가 공유하는 정체성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도 "색은 사람을 모으는 상징이자 가치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강력한 매개체"라고 했다. "색을 공유한다는 자체가 하나 된 감정으로 소통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20년 넘은 아이돌 컬러 전쟁
이제 막 색깔 분쟁이 시작된 정치권과 달리 아이돌들은 20년 넘게 전쟁을 반복해왔다. 1990년대 중후반 'HOT 세대'부터 K팝이 세계로 뻗어간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했다.
본격적인 팬덤 컬러의 등장은 1990년대 후반. 색색 풍선과 우비는 각 그룹의 인기와 팬덤 세력을 과시하는 척도였다. 'HOT'의 하얀 풍선, '젝스키스'의 노랑 풍선, '핑클'의 빨강 풍선이 대표적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처음엔 팬덤 구별 수단으로 색깔이 등장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편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컬러였다"고 했다. "여러 그룹이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할 때 자기가 누구의 팬덤이라는 걸 알리는 표식이 색깔이었다. 운동회에서 청군, 백군으로 나누는 것과 같은 심리"라고 덧붙였다.
'해피핑크'를 만든 김찬형 미래통합당 홍보본부장(광고 전문가)은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있듯 색은 '한편'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된다. 노란 수건을 썼던 황건적(黃巾賊)이나 깃발 색깔로 적과 나를 구분했던 역사도 이를 보여준다. 아이돌 그룹 팬덤과 정당 색에도 그런 면이 있다"고 했다.
한국 팬들의 컬러 집착은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홍종윤 서울대 ICT 사회정책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저서 '팬덤 문화'에서 "팬덤은 차별화 기제를 통해 팬덤과 팬덤 외부 세계 사이뿐만 아니라 팬덤 간의 차이를 만들어냄으로써 고유의 정체성을 구축한다"며 "한국 아이돌 팬클럽의 색깔에 대한 구별 짓기는 그 정도가 심하다"고 했다. 피아(彼我)의 구분이 확실한 한국 문화가 배타적인 컬러 집착을 이끌었다는 분석도 있다.
시차 뛰어넘은 팬덤 컬러전
색도 진화한다. 발광력이 좋은 응원봉이 속속 도입됐다. 요즘 공연장에서는 응원봉을 원격 제어해 무지갯빛 조명을 만들기도 한다.
풍선 응원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지만 공식 색의 존재감은 팬들에게 여전히 크다. 아이돌 그룹이 데뷔해 팬클럽을 창단하면 자연스럽게 공식 색을 정한다. 색 선정이 갈수록 까다로워진다. 기존 그룹이 선점한 색깔을 피하다 보면 선택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 비슷한 색으로 공식 색을 정했다간 '선배 팬덤'이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수 있다.
10~20년 시간 차를 두고 색깔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2015년 그룹 '비투비'가 하늘색을 공식 색으로 정하자 '하늘색 풍선'이 상징인 'god(지오디)' 팬들은 분노했다. 비투비 소속사에 항의문을 수십 통 보내고 두루마리 휴지 담은 택배를 보내며 거세게 반대했다. god 멤버 박준형이 "색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냥 색이다. 크게 생각하라"고 중재했다. 2015년 그룹 '아이콘'이 응원봉을 주황으로 만들자 오랫동안 주황을 상징 색으로 써온 '신화' 팬클럽이 반발했다. 결국 신화 에릭이 "가능한 주황색을 피해달라"고 나섰다.
최근 트로트 인기를 타고 중장년층으로 팬덤 문화가 확산하면서 팬덤 컬러는 외연을 확장했다. 홍자는 보라색, 임영웅은 하늘색 식으로 팬의 다수가 중장년층인 트로트 가수들도 상징 색이 있다. 이향은 교수는 "컬러는 남녀노소, 학식 유무를 떠나 식별 가능하기에 강력한 도구인데 최근엔 중장년의 컬러 수용도가 예전보다 높아졌다"고 했다. 송가인의 중장년 팬이 '핑크 사수'에 들어간 현상과도 연결된다.
새로운 색 찾아 삼만리
분쟁을 피하며 새로운 색을 찾기 위한 노력이 가상하다. 첫째 전략은 '펄 추가'다. 웬만한 원색은 선점되었으니 반짝이를 넣어 차별화하는 것이다. '동방신기'는 펄레드, 보아는 펄옐로, '샤이니'는 펄아쿠아를 공식 색으로 정해 논란을 피했다.
다음은 색상 코드로 정확한 색을 공표하는 것.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는 화장품 업계의 우스갯소리처럼 하늘색도 다 같은 하늘색이 아니라는 전략. 비투비의 하늘색은 슬로블루(색상 코드 #42B4E6)다. 가장 따끈따끈한 전략은 여러 색을 섞는 방법. 단색 중에는 겹치지 않는 색을 찾기 어려워져 나온 궁여지책이다. 여자 솔로 가수 청하는 연두색(팬톤 374C), 하늘색(팬톤 332C), 보라색(팬톤 358C)을 연결한 조합을 공식 색으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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