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3일 '열다섯' 이창호, 스승 조훈현을 꺾다 [오래 전 '이날']
[경향신문] 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0년 2월3일 ‘제자’ 이창호, ‘스승’ 조훈현을 처음으로 이기다

‘바둑 전설’로 불리는 조훈현 9단(67·현 자유한국당 의원)과 이창호 9단(45). 차례로 세계 바둑의 최정상에 오른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1989년 응씨배 승리로 세계 1인자가 된 조훈현 9단은 이듬해 자신이 집에서 가르치던 열다섯살의 제자 이창훈에게 패배합니다. '사제'로 만나 '라이벌'이 된 두 사람의 일화는 늘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지요.
30년 전 ‘오늘’인 1990년 2월3일 경향신문에는 <이창호군 “청출어람” 바둑보은>이란 기사가 실렸습니다. 전날인 1990년 2월2일 있었던 조훈현9단과의 대국에서 이창호 9단이 스승을 누르고 최고위타이틀을 따냈다는 내용입니다. 전국규모의 공식기전에서 처음으로 이창호9단(당시 4단)이 조훈현 9단을 꺾은 것입니다. 극적인 ‘반집승’이었습니다. 이날의 승리로 당시 15살이었던 이창호는 최연소 최고위타이틀 보유자가 됩니다.
스승을 이겨버린(?) 제자는 대국이 끝나자 무슨 말을 했을까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이날 대국에서 박빙의 반집승을 거두고 승리가 확정되자 이4단(이창호)은 “선생님, 죄송합니다”며 그동안 내제자로 지도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시종 긴장된 모습으로 끝까지 대국에 임했던 조9단(조훈현)은 패배가 확정되자 환한 웃음으로 이4단(이창호)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창호9단은 전주에서 귀금속상을 경영하는 이재용씨의 3남 중 2남으로, 1984년 조훈현9단의 내제자로 들어갔습니다. 내제제란 스승의 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는 제자를 말합니다. 이후 1986년에 입단한 이창호는 28기 최고위전·패왕전·국수전에서 스승인 조훈현과 겨뤘지만 번번이 패했습니다. 그런데 29기 최고위전에서 결국 스승을 누르게 된 것입니다. 조훈현 9단의 내제자가 된 지 6년만의 일입니다. 당시 바둑계에서는 “(이창호가) 조9단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면서 “이창호 시대의 서막”이라는 평가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창호9단은 조훈현9단을 사사했지만 바둑 두는 스타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조훈현 9단은 날쌔고 빠른 ‘제비’에 비유된 반면 이창호9단은 조용하고 침착해 ‘돌부처’로 불렸습니다.
<월간 바둑>의 편집장을 지낸 정용진씨는 ‘조훈현-이창호의 10년 사제대결’이라는 글에서 둘의 기질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조훈현 九단이 모차르트 같다면 이창호 九단은 베토벤을 닮았다. 화려한 음색, 귀에 착착 감기는 모차르트 선율에 비하면 베토벤의 화음은 어둡고 무거우며 사색적이다. 작곡 과정도 완벽을 추구하며 쓰고 고치기를 거듭한 베토벤에 견주면 모차르트는 일필휘지였다. (중략) 고전파의 완성과 낭만파의 시작을 연 베토벤처럼 나는 이창호를 위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조훈현만큼 천재적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노(NO)”다. 모차르트가 선천적인 천재라면 베토벤이나 브람스를 후천적 노력형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창호도 그런 유형의 천재로 보고 싶다.“
‘돌부처’ 이창호9단은 스승을 이긴 후 승승장구해 15년이 넘도록 바둑계 ‘왕좌’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에 ‘센돌’ 이세돌에게 바둑계 최정상의 지위를 뺏기게 됩니다. 침착하고 안정적인 이창호9단과 달리 이세돌9단은 상대를 당황시키는 의외의 수를 두어 판을 흔드는 ‘전투형’ 이었다고 합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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