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은 무슨 이유로 '향기나는 절'을 지었나
[국보의 자취-25]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분황사와 영묘사, 황룡사 9층 목탑, 첨성대 등 일련의 국가사업들을 마무리했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국력의 열세를 당나라를 끌어들여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외세에 의존한 외교정책을 추구했다는 비판과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그런데 당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선덕여왕을 심하게 모욕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태종은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여왕이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면서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하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했다. 꽃이 피니 과연 왕의 말대로 향기가 없었다고 삼국유사는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똑같은 얘기가 선덕왕조 전반부에 실려져 있다.
당태종은 그림까지 보내 향기가 없는 모란꽃에 비유하면서 여자이자 짝(벌, 나비)이 없는 선덕여왕을 대놓고 조롱한 것이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 선덕여왕의 배필"이라고 적고 있다. 당태종의 놀림을 받은 후에 짝을 얻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내연남을 숨겨 뒀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선덕여왕을 매우 박하게 평가한다. 그는 논평에서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선덕여왕의 혼이 깃든 분황사는 소규모지만 아름다우면서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주 도심에서 비켜나 있는 북천변에 위치해 경주 여행 때 놓치기 십상인 장소다. 그러나 불국사, 첨성대 못지않은 경주의 대표 유적지다.
불교 대중화의 선각자이자 한국 지성사에서 탁월한 대학자인 원효대사가 머무르면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분황사 경내 한가운데 신라 석탑 중 가장 먼저 세워졌다는 모전석탑이 있다. 634년 분황사 창건 당시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의 정식이름은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이다.
'전탑(塼塔)'은 말 그대로 흙벽돌을 구워 쌓아 올린 탑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모전탑(模塼塔)'은 벽돌의 전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이다. 모전탑인 분황사 모전석탑은 화산암의 일종으로, 검은 회색을 띠는 안산암(安山巖)을 벽돌처럼 잘라 세웠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전탑은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 시작했으며 지금도 유적이 인도 곳곳에 남아 있다.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도 전래됐으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숭악사 12각 15층탑(523년 조성)을 비롯해 중국 여러 지역에 전탑이 현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조성되기 시작해 통일신라 때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후 고려시대에도 건립됐다. 그러는 와중에 전탑을 모방한 모전탑이 등장했다. 모전탑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탑의 양식이다.

탑의 재질이 벽돌을 거쳐 돌로 변화하면서 탑의 크기도 대폭 줄어들게 된다. 신라는 특이하게도 전탑과 모전석탑이라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쳐 석탑으로 발전해 간다. 삼국유사 '양지사석(良志使錫)'조는 신라 최고의 조각가이자 화가, 서예가인 승려 양지(良志)를 소개하면서 "(양지는) 글씨와 그림 실력도 뛰어났으니 영묘사(靈廟寺·경주 서악동에 있던 사찰)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 천왕사(天王寺) 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불교의 여덟 수호신)과 법림사(法林寺·안동 운흥동에 있던 사찰)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이 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모전탑)를 만들었고,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고 썼다.
승려 양지가 모전탑을 처음 세웠는데, 그 이전에 전탑이 존재했고 이 탑의 기와를 양지가 쌓았다는 내용으로 전탑이 모전탑을 앞서는 증거로 종종 인용된다. 대표적 모전탑인 분황사탑이 7세기 전반에, 대표적 전탑인 국보 제 16호 안동 법흥사지 전탑이 1세기가량 늦은 8세기에 조성된 것을 볼 때 '전탑-모전탑'의 순서는 대체적 경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어쨌든 모전탑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집중된다.
돌 다루는 기술이 상대적으로 앞섰던 백제는 목탑에서 전탑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그 증거로 언급된다. 신라도 통일 이후 석조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전탑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벽돌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벽돌 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던 점을 전탑이 널리 확산되지 못한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전탑과 모전탑을 통틀어 백미로 꼽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높이가 9.3m이다. 지금은 3층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을 것을 짐작된다.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이 '7층 설'을 주도했다.
동서남북으로 석문이 달려 있는 공간은 감실(龕室·불상을 안치한 방)이다. 석문 양쪽에 서 있는 악귀를 막아주는 불교의 수호신 인왕상을 조각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은 반라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석탑의 모서리에는 수호의 기능과 함께 부처의 계율을 상징하는 힘찬 사자상을 두었다.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암사자,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수사자가 있다. 모두가 신라인의 섬세하고 빼어난 조각 기술을 마음껏 뽐낸 수작이다.
탑은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됐으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승려가 수리하려다가 오히려 더욱 파손시켜 1915년 재차 손을 봤다. 이때 2층과 3층 사이의 사리를 넣는 공간에서 사리장엄구와 구슬, 실패, 바늘, 침통, 가위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전탑과 모전탑은 건립된 수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료의 취약성에서 오는 파괴와 훼손도 심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20점에도 채 못 미치는 형편이다. 지정문화재로는 벽돌탑, 즉 전탑의 경우 전술한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이 유일한 국보이다. 전탑·모전석탑를 통틀어 국보 번호가 제일 빠르다.

벽돌을 모방한 석탑, 즉 모전석탑도 국보가 분황사 모전석탑과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 제187호) 등 2점에 불과하다.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역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측한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잘 이루고 있으며 축조 방식이 정연해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 조각과 청자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전탑은 보물 제56호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 보물 제57호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보물 제189호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등 4점이다. 보물 모전석탑으로는 보물 제459호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1점이 있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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