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의 일본사 이야기] '갈라진 에도'에 등장한 이이 나오스케, 통상문 열고 쇼군 후계도 해결
美 해리스 '애로호 사건' 이용 日 압박
실세 홋타, 개항 추진했지만 일왕 거절
후계 문제로 에도 정계 혼란에 빠지자
막부, 나오스케 영입해 비상시국 맡겨
칙허없이 美와 조약 체결·후계자도 결정
전국시대가 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혼자 평화롭게 쇄국하며 살겠다고 그게 유지될 턱이 없다. 결국 좋든 싫든 부국강병에 힘쓸 수밖에 없다. 홋타는 개국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개국을 훗날 세계를 통일할 기초로 삼자. 널리 만국에 항해하고 무역을 하며 서양인들의 장점을 취해 우리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국력을 기르고 국방을 튼튼히 하자.” 그런데 홋타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하면 장차 전 세계가 일본의 위엄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만국이 일본을 세계만방의 대맹주로 떠받들고 일본의 가르침을 받들며 일본의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이상 ‘대일본고문서:막말외국관계문서(大日本古文書: 幕末外國關係文書)’에서)
당시 일본의 국력을 생각하면 이는 망상에 불과했다. 누구보다도 세계와 일본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홋타가 왜 이런 과대망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개국에 반대하는 세력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런 ‘해외팽창론’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결국 태평양전쟁의 참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망상은 현재도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이 세계적인 대국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중국에 적대적이다. 일본은 중국에 버금가는, 혹은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조금만 곱씹어보면 비현실적인 생각에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 한국인들 중에는 이 정도의 망상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국과 일본은 문화와 경제·교육·기술로 세계에 공헌하는 강중국·강소국이 되면 안 되는 것일까.
당시 일왕은 36세의 고메이(孝明) 일왕이었는데, 그는 홋타가 생각한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초부터 일왕들은 ‘일본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군주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유학경서와 역사서를 읽고, 신하들과 열심히 토론했다. 이들의 공부 스케줄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이런 ‘열공’ 분위기 속에서 교토의 분위기도 변해 있었다. 일왕도 그의 신하인 공경(公卿)들도 기회만 오면 정치와 천하대사에 간여할 의욕에 넘치고 있었다. 막부와 홋타는 이를 간과했던 것이다.
홋타의 상경에 대해 고메이 일왕은 놀라운 말을 했다. “(홋타가 상경해서) 아무리 거금의 선물을 뿌리더라도 거기에 눈이 먼다면 천하의 재앙이 될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란 금전에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번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실로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유신사(維新史)’ 2권).” 그러면서 자신도 헌상물을 일절 안 받고 막부에 돌려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도쿠가와 시대에 일왕과 조정 공경들은 경제력이 형편없었다. 당시 막부의 금전적 지원이나 선물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런데도 고메이 일왕은 신하들에게 이를 거부하라고 한 것이다. 홋타가 가져올 개국 요구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배수진이었다.
이로부터 몇 달 동안 대소란이 벌어졌다. 상급공경들은 궁궐 내에서 서로 싸웠고, 하급공경들은 떼를 지어 데모를 벌였다. 전에 없던 일이다. 수백 년 동안 정치적으로 동결돼 있던 교토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홋타는 일왕의 칙허를 받지 못한 채 에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그 사이 에도에서도 큰일이 있었다. 쇼군 후계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당시 쇼군 이에사다는 34세로 아직 젊었으나, 어려서부터 허약해서 누가 보더라도 자식을 볼 가능성이 없었던 듯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다가 이때 본격화한 것이다. 후계 문제는 에도 정계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권력핵심에서는 쇼군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기이번(紀伊藩)의 요시토미(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밀었다. 당시 나이 불과 12세.
반면 그동안 권력에서 소외돼왔던 다이묘들과 막부 내 비판세력들은 요시노부(훗날의 15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요시노부는 당시 21세로 건장하고, 무엇보다 총명하기로 소문이 난 청년이었다. 다만 그에게는 결정적 약점이 있었다. 바로 친부가 도쿠가와 나리아키라는 점이다. 나리아키는 종친의 한 사람이면서 집요하게 막부 정책을 비판하던 사람이었다. 페리가 왔을 때도 막부를 공격하며 미국과의 화친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다. 게다가 그는 재정을 국방에 쏟아야 한다며 오오쿠(大奧, 쇼군의 후궁)에 들어가는 경비의 대폭 삭감을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오오쿠는 심신 모두 비정상이었던 쇼군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858년 초여름 다이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는 단 두 달 만에 조약체결과 후계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조약(미일통상조약)은 일왕의 칙허를 받지 않고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은 서양 주도의 국제체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우리가 일본과 개항조약을 맺은 것은 1876년(강화도조약), 서양과는 그보다도 늦은 1880년대 초였다.
조약체결과 거의 동시에 쇼군의 후계자도 요시토미로 결정해버렸다. 요시노부를 밀던 다이묘들은 에도성에 몰려들어 거칠게 항의했으나 일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오히려 다이로는 허가도 받지 않고 에도성에 들어왔다며 이들을 처벌했다. 도쿠가와 시대 통틀어 사상 최대 정변(안세이의 대옥)의 시작이었다. 정변에 자극받아 전국에서 사무라이들이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유신지사(維新志士)’의 등장이다. 이 가운데는 저 멀리 조슈번(長州藩)의 한 열혈청년도 있었다. 이름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이제 이 젊은이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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