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구직 위해 '동명왕편' 지어.. 무신도 염두에 둔 듯"

강구열 2020. 1. 28.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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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최초 장편 서사시 창작 배경은 / 관료 아버지 사망·결혼 후 식구 늘자 / 넉넉한 삶에서 생계 걱정하는 신세돼 / 유학자들이 떠받드는 中 신화 끌어와 / '고려는 성인이 이루어 낸 왕조' 강조 / 무신정권서 고주몽 소재로 관심 끌어
훗날 고려의 대문호로 이름을 날릴 것이나 26살(1193년)의 이규보는 밥벌이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어렵게 과거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은 쉬 열리지 않았고, 정치적·학문적 후원자로 여유로운 삶을 뒷받침했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결혼을 하고 딸까지 낳고 보니 호구지책은 더욱 절실해졌다.

이규보는 이런 상황에서 동명왕(주몽)을 주인공으로 고구려 건국신화를 노래한 ‘동명왕편’을 세상에 내놨다. 스스로 밝힌 창작의 동기에는 결기가 넘친다.

“동명왕의 이야기는…실로 나라를 세운 신이한 자취이니…이에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이 이룩한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고 싶은 것이다.”

팍팍한 현실에 주눅이 들었을 법도 한 ‘생활인 이규보’와 원대한 포부를 가감없이 드러낸 ‘지식인 이규보’. 동명왕편을 번역하고, 주석 및 해설을 달아 최근에 발간된 ‘동명왕편-신화로 읽는 고구려의 건국 서사시’는 어딘가 상반되어 보이는 그의 이 두 가지 정체성이 문자로 전하는 한국사 최초의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이라고 설명한다.
고려의 정치인이자 문인인 이규보의 표준영정.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통해 고려가 중국에 못지않은 ‘성인의 나라’임을 천명했다.
◆“성인이 이루어 낸 왕조임을 알리고 싶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명왕편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지금이야 이런 형식의 이야기가 가진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지만 이규보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신화란 황당하고, 기괴한 것이어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공자의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괴이하고, 힘세고, 어지럽고, 귀신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이란 언급은 유학자들에게는 ‘금과옥조’였다. 스스로 유학자이기도 한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짓는 논리적인 근거, 창작의 정당성을 분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는 유학자들이 성인으로 떠받드는 중국의 신농씨, 복희씨, 요순 임금 등의 신화를 끌어온다. “하늘에서 좁쌀이 떨어져 신농이 마침내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느니 “요가 어진 임금이 되니 하루에 열 가지 상서로움이 나타났다” 같은 이야기를 동명왕편의 첫머리에 배치했다. 중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버젓이 하고 있는데 동명왕의 신이한 이야기가 무슨 문제냐, 고 반문한 것이다. 또 동명왕과 비슷한 시대를 살며 왕조를 열었던 한고조 유방, 후한의 창업자 유수의 탄생과 성공에 부응한 상서로운 징조들을 글의 말미에서 밝혔다. “이규보는 주몽을 이들과 동궤에 놓아 천명의 신성함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실재성을 강화하려는 수법을 구사한” 셈이다.

이규보는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읽고 난 뒤 “동명왕의 신화를 밝은 세계로 이끌어내는 시적 결단을 감행”하며 “‘저들이 중화면, 우리도 중화’라는 강한 집단적 자부심”을 드러내는 배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 또한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이나 거듭 음미하면서 점점 그 근원을 찾아들어가니, 환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이규보의 묘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직을 위해 창작된 동명왕편

책은 그러나 “(동명왕편의) 서문에 명시된 창작 동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 수는 없다”며 동명왕편 창작의 이면을 파헤치는데, 여기서 ‘생활인 이규보’의 면모를 소개한다.

이규보의 아버지 이윤수는 지금의 경기 여주 중소지주로 수도 개경에까지 진출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한 관료였다.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았던 덕에 그는 “현실에 대한 관조와 비판, 그리고 현실도피라는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과 결혼 등을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동명왕편을 짓던 그 해(1193년), 예부시랑 장자목이 자신을 추천할 것이란 소문을 듣고 구직을 부탁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장자목 시랑께 바침’이란 제목의 이 장편시에는 “명성은 벼락을 놀라게 할 듯 도량은 강호를 품은 듯”이라는 낯간지러운 찬양까지 등장한다. 연이어 나온 것이 동명왕편이었다. 책은 “동명왕편의 창작 동기를 복합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동기가 강했을 것”이라며 “동명왕편을 ‘구관시’(求官詩)의 하나로 보는 시각은 정곡을 짚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욕구를 감안하더라도 왜 하필 유학자 관료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책은 “무신들이 정권을 좌우하던 시기에 성장한 그로서는 무신들도 좋아할 만한 소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며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임했던 고려 사회에서, 무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력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고주몽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적절한 소재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고려가 ‘성인의 나라’임을 밝힌 부분에서는 중국 왕조에 못지않다는 당시 고려 지식인들의 문화적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이규보의 이 같은 인식은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년)에서도 표현된다. 제왕운기의 첫머리는 “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중화인들이 소중화라 이름 지었네”라는 구절이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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