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Cap) 스타일 모자의 군용 모자 케피(Kepi) (하)
[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127] 1. '오리 주둥이'라 불렸던 초기의 케피
프랑스군 장교들은 불편한 샤코 대신 아프리카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러나 제식 규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각자 주문 제작했기 때문에 규격과 재질이 제각각이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프랑스군은 1852년 영내로 착용 지역을 한정한 아프리카 모자 개량형을 내놓았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케피의 첫 모델이 된다. 프랑스군은 명칭을 'bonnet de police a visiere(순찰 챙 모자)'로 정했지만 너도나도 그냥 케피로 불렀다.

2. 1867년형, 1886년형 케피
1870년 보불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군은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샤코 착용을 지시했다. 케피는 어디까지나 영내 착용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높고 딱딱하여 불편한 샤코 착용을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기존 샤코 대신 케피를 쓰고 전장에 나갈 수 있게 규정과 지침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이때 프랑스군 장병들이 착용한 것이 1867년형 케피다. 1867년 케피부터 통이 조금씩 낮아지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던 디자인이 원통형으로 바뀐다. 챙은 네모진 모양새였는데 이 때문에 '오리 주둥이(bec de canard)'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몇 차례 개선을 거쳐 1886년형 케피가 나왔다. 사실상 케피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1886년형 케피를 썼다.
1886년형 케피의 가장 큰 특징은 챙의 형태였다. 1867년형 케피의 '오리 주둥이' 챙은 낡으면 모서리 쪽이 구부러졌다. 우천 시에는 구부러진 모서리를 타고 비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런 이유로 챙을 둥글게 바꾸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자의 챙은 이때부터 둥근 모양이 된 것이다.

둥근 챙 위에는 가죽끈이 달려 있다. 필요할 때 늘려서 내리면 턱끈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케피 안쪽에 머리 보호를 위한 철제 덮개를 넣어서 썼는데 그 때문에 철제 덮개와 케피를 고정하기 위한 턱끈을 달았던 것이다.


아래의 케피는 프랑스군 제322연대 소속 영관 장교가 착용했던 것이다. 케피 전체에 보이는 황금색 세 줄 브레이드는 영관 장교를 뜻한다. 크라운 부위를 보면 병사와 달리 문양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오스트리안 노트(Austrian knot)'라고 하는데 장교 계급을 나타내는 표시로 썼다.

3.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케피의 퇴장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케피에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색이 적색에서 청색 혹은 회색으로 바뀐 것이었다. 적색은 너무나 눈에 잘 띄어서 마치 '날 쏴주세요' 하고 표적을 쓰고 다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케피의 색을 눈에 덜 띄는 색으로 바꿨지만 전사상자 수가 줄어들진 않았다. 포탄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대량 전사상자 발생의 가장 큰 원인은 포탄이었다. 전쟁 전 '가볍고 부드럽다'는 호평을 받았던 케피는 돌연 실용성 떨어지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곧 프랑스군 최초의 철제 헬멧인 '아드리안 헬멧(Adrian Helmet)'으로 교체되었다.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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