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3~4세기 日 진출한 가야..해협 사이에 두고 원격통치 가능성
대한해협 건너간 가야
4국 해양 경쟁시대
일본 속 가야의 흔적
한 집단의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간혹 회복될 수도 있다. 반면 외부 충격(침략)을 받으면 멸망에 이르기 쉽고, 재활하기 힘들다. 가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했기 때문에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가야는 농업과 수로망이 발달한 낙동강 유역과 어업 생산력이 좋으며 무역에 적합한 남해안을 터전 삼아 12개 이상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해양 무역을 활용해 일찍부터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부산 대성동에 있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의 가야 목곽묘들에서는 철제갑옷과 투구, 마구류, 가죽방패 등이 나왔다. 2호분에서는 대형 철덩이 150점, 철칼 등이 발견돼 기마문화가 존재했고 무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파형(바람개비) 청동기물, 통형 청동기물 같은 일본제로 알려진 유물도 출토돼 혼란을 일으켰지만, 제작 시기와 수준을 고려해 가야가 원류라는 주장(김태식)이 있다. 설사 일본제라고 해도 상호 교류하는 해양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우수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제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성격을 반영하는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 만들어졌는데, 부장품들은 주로 가야와 연관됐다.
4국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해양 경쟁
5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질서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중국에선 위진 남북조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등은 중국의 분단을 이용해 해양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따라서 해양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으며, 고대 국가의 규모와 활동 범위도 확장됐다. 고구려는 팽창의 기회를 맞아 북방 진출을 추진하는 한편 400년에는 광개토태왕이 신라의 구원 요청을 명분 삼아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남진시켰다. 백제·가야·왜 세력은 고구려에 대패했고, 이때 금관가야의 일부는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 등으로 흡수됐지만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갔을 것이다. 고구려도 404년 대방계 전투 이후에는 왜군을 쫓아 남해와 동해남부를 건넜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 또한 고구려의 압력에 대응하고, 무역을 목표로 일본 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활발하고 역동적인 4국의 일본 열도 진출 시대가 도래했다.
일본 열도에서 새로 축조되는 전방후원분들은 더욱 커지고, 내부도 횡혈식으로 바뀌면서 철제무기와 마구들, 금은 세공품들이 매장됐다. 2600여 기가 남은 전방후원분 분포를 보면 대략 4~5개 지역에 집중됐다. 또한 5세기 후반에 ‘기히(吉備)의 난’, 6세기 전반 규슈에서 ‘이와이(磐井)의 난’이 각각 일어났다. 이런 현상은 통일되기 이전에 4~5개의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으며, 중심은 관서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왜 세력들은 백제와 무역 및 인적·문화적 교류가 빈번했고, 사료에서 보이듯 정치·군사적으로도 관련이 깊었다. 또 ‘왜국’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일부는 전남의 전방후원분들에서 나타나듯 한반도 남부에도 진출했다.
이렇게 해서 동아지중해에서는 항로 확보 등을 둘러싼 해양력 경쟁체제가 만들어졌다. 국가들의 역학관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가야 세력들은 남해항로의 독점권을 빼앗기고 무역의 이익이 분산되면서 그 위상이 약해졌다. 해양국가인 데다 연맹체제를 벗어나지 못해 효율적인 관리와 조직적인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가야의 핵심 세력은 이 한계들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일본 열도로 더욱 진출했다. 남은 세력들 가운데 낙동강 중류의 수로망을 장악한 대가야와 남강·남해안의 항구를 가진 아라가야는 고령의 지산동 32호, 44호분과 함안의 말이산 34호분에서 기마용 장비들이 출토된 것처럼 제철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본 열도와 교류했다.
가야, 양안 국가 체제 선택
이런 복잡한 시대 상황과 왜와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몇 가지 있다. 임나일본부설(일제강점기 일본학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에가미 나미오), 부여계 기마인들의 진출설(존 코벨), 일본 열도 내 삼한 분국설(북한의 김석형), 백제 진출설(신채호, 문정창), 전남의 전방후원분으로 인한 새로운 설들이 있다(박천수). 소위 ‘기마민족설’은 4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기마민족이 북규슈로 이동한 후 임나까지 포함해 ‘왜·한 연합왕국’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왕이 북규슈에 본거지를 두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권을 주도한다는 논리이므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는 한계가 있다.(천관우)
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해를 왕복하면서 그리스의 폴리스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등이 바다를 사이에 둔 ‘양안(兩岸) 국가’ 또는 식민 모국(母國)과 자국(子國)의 2중 체제였음을 깨달았다. 또한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스페인의 ‘지브롤터’는 영국 영토이고, 반대로 아프리카의 ‘세우타’는 스페인 영토라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렇다면 가야는 원격통치를 하는 양안 국가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열도에 오랫동안 진출하면서 교류했고, 대한해협은 교통과 통신이 가능할 정도로 짧은 거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열도 북부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건국신화 등은 이런 상황을 뒷받침한다.
가야계의 일본 고대국가 형성
7세기 중반 신흥 국가로 탄생한 일본은 8세기 초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첫 부분에 복잡한 주체 세력들의 계보와 정통성을 확립하는 창세신화와 건국신화를 기록했다. 즉, 태양여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의 손자(天孫)인 니니기노미코도(瓊瓊杵尊)가 삼종신기(거울·칼·곡옥)를 갖고 다카마노하라(하늘)를 떠나 히우가(日向)의 구시후루(觸峰, 久士布流多氣)로 하강한다. 그리고 후손인 짐무(神武)가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야마토 지역까지 정벌한 후 초대 천황이 된다.
이 신화는 기본 줄거리가 단군신화와 김수로왕 신화처럼 천손강림 신화다. 내용은 물론이고 붉은 천에 쌓여 내려온 지명도 거의 비슷하다(구시후루는 구지봉과 음이 비슷함). 이 때문에 가야계 집단이 일본 열도에 도착해 고대국가를 형성한 과정으로 해석한다. 물론 정치력이나 군사력, 그리고 국제질서를 고려하면 주체는 원가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주체는 당시 상황을 모호하게 서술함으로써 종속적이었던 왜 집단을 주체인 것처럼 해석하는 ‘임나일본부설’과 ‘기마민족국가설’을 낳게 만들었다(천관우). 가야계 지명은 지금도 쓰시마(대마도)나 규슈 북부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천손을 모시는 기리시마 신궁 근처에는 ‘가라구니다케(韓國岳)’가 있다. 고대부터 항해자들이 처음 도착하는 규슈 북부에는 ‘가라의 항구’라는 뜻인 ‘가라쓰’가 있는데, 원래는 ‘한진(韓津)’으로 사용했으나 14세기부터 ‘당진(唐津)’으로 바꿔 버렸다.
6세기 중반에 가까워지면서 대형 배의 건조술과 원거리 항해술이 발달하고, 신라와 백제에 이어 고구려가 일본 열도에 적극 진출했다. 위상이 약해진 가야연맹은 망국에 가까운 국난을 겪고도 통일에 실패한 채 지탱하다 신라에 각개 격파되고, 남은 대가야도 562년에 멸망했다. 그 결과 한때 남해의 양안을 통치한 해양왕국 가야는 500년 역사를 기록조차 제대로 못 남겼고, 일부만 일본 역사 속에 남겨 두었을 뿐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 네이버에서 한국경제 뉴스를 받아보세요
▶ 한경닷컴 바로가기 ▶ 모바일한경 구독신청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