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예술이 될 때

임지영 2019. 12. 2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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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일 작 <홍이네 집>

풍경으로만 남아있는 순간이 있던가? 필시 누군가 거들었을 것이다. 가만히 어깨를 내어줬던지 지그시 곁에만 있어줬던지 아니면 호들갑스런 감탄사로 지구를 광광 울리면서.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풍경엔 주인이 있다. 강릉의 이름도 순둥방긋한 순긋 해수욕장, 겨울 바다를 달려가던 당신이 있다. 나 잡아봐라(웃음)는 아니었지만 차갑게 언 모래 위에도 선명하게 꾹꾹 찍히던 발자국. 몹시 추웠지만 자꾸 웃음이 났다. 멈춰지지 않았다. 마음에 발자국이 난 양 겨울 내내 그래서 웃음이 헤픈채 실실거리고 다녔다. 늘 좀 미열이 있는 채로 볼이 빨간 채 다녔는데 보는 사람마다 예뻐졌다고 했다. 잊지못할 인연과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겨울 바다에는 꼭 가고 볼 일이다.

난데없이 우리 셋은 산 꼭대기에 남았다. 대암산 꼭대기 용늪이었다. 타고온 차의 타이어가 펑크 나서 일행 중 두명이 다시 산 아래로 차를 가지러 내려간 터였다. 시간은 아침 10시, 가진 건 와인 큰 것 한 병. 희부윰한 안개 속에서 시간도, 공간도 양자물리학처럼 얼키고 설키는 풍경. 우리는 그런 안개 속에서 안주도 없이 호록호록 마셨고 취했다. 맞다, 안주로는 혼자만 간직한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안개 속에 깡그리 묻기로 약속했다. 그래서인지 진짜 한개도 기억이 안난다. 비밀 몇 개 틀어쥐고 있어야 나한테 잘하라며 은근 협박도 하고 놀려먹기도 할텐데 안개의 위력이란! 세상에 덮지 못할 비밀은 없다. 그러니 안개 그득한 날에 다 털어놓으시라.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처음에 낄낄거리던 우리는 제주 새별오름 가파른 경사를 기어오르며 숨이 깔딱 넘어갔다. 기어코 오른 오름.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새별 오름. 사방이 초여름의 연두고 초록이었다. 우리는 셋이서 마치 짠 것처럼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우와! 흐어! 꺄하! 야야!" 모든 말들을 감탄사로만 했는데 다 알아들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는데 딱 그런 날이었다. 그리워 할 사람들이 다 곁에 있던 시절이어서 마음은 초록초록 그저 선명했다. 언제까지고 그럴거라고 생각했고 확신했다. 사람이 한시절을 함께 하고 같은 풍경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일인지 미처 몰랐다. 선명하던 마음이 시간 속에서 퇴색해가고 그 자리에 그리움이 든다는 걸 그 때는 아예 몰랐다.

마당엔 그네가 있었다. 녹이 조금 슬어 움직일 때마다 삐꺽 삐꺽 장단을 맞춰주는. 우리집은 정릉 4동의 노란 양옥집였는데 나와 동생은 그네타기를 제일 좋아했다. 아빠가 뒤에서 그네를 밀어주면 북한산이 훅 다가왔다 멀어졌다. 정말 풍경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가까웠고 또렷했다. 그네가 멈춘 후에도 거기 앉아서 오래도록 산의 푸르고 어둔데를 바라봤다. 풍경이 주는 위안을 그 때부터 알았다. 시시각각 움직이고 변하는 가볍고 약한 마음에 도저히 변치않는 중심같은 느낌이었다. 다정한 위로에는 그네를 밀어주는 따뜻한 손과 좀처럼 변치않는 풍경이 필요했다. 살아보니 그런 사람과 풍경을 오래도록 지니고 있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내 곁엔 둘 다 없다.

며칠전 서울 아트쇼에 가서 판화 한 점을 데리고 왔다. 김용일 작가의 <홍이네 집>. 어둡고 따뜻한 밤의 시골집 풍경이다. 나는 시골에 살아본 적도 없고 따라서 그리운 풍경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애틋하고 애잔해졌다. 김용일 작가는 모든 풍경에서 누군가를 부른다. 그리워한다. 홍이, 명순이, 상동이, 창우, 샘내 마을. 그의 작품은 모두 아스라한 오래전의 풍경이고 제목엔 그리운 이름들이 붙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그리움이 가슴 속으로 막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이제껏 그리워 할 풍경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워 할 사람을 까무룩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보고 어둔 밤에 따뜻한 오렌지 불빛 켜지듯 아득한 맘에 그리운 불빛 노오랗게 켜졌다.

그림의 모서리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그림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기울이는 것이 좋다. 정교하게 매만졌을 손길을 기억하고, 정성을 다했을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좋다. 보다 보면 들린다. 느껴진다. 밤벚꽃 흐드러진 큰 나무 아래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리운 것은 부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가만히 불러보기만 한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줄 알지만 어떤 그리움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임지영 나라갤러리 대표/ <봄말고 그림>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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