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구르밍한 마리테레즈의 꿈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26. 파블로 피카소, ‘꿈’
1927년 1월 마리테레즈 발테르는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쇼핑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제 17살. 세상을 탐색하려고 기지개를 켤 나이였다. 흘러내리는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이제 막 지하 계단에서 올라온 그때, 누군가 난데없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린 마리테레즈의 회색 눈동자에 들어온 사람은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이런 말을 쏟아냈다. “당신은 흥미 있는 얼굴을 가졌군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소. 당신과 나는 함께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46살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였다.
피카소이든 말든. 마리테레즈는 이 무례한 아저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수영과 등산을 좋아하는 십대였을 뿐, 예술에 대해선 전혀 몰랐고 피카소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집요했다. 그는 6개월 동안 마리테레즈를 쫓아다녔다. 피카소는 그녀를 서커스와 극장에 데려가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환심을 샀고, 마리테레즈의 어머니에게도 초현실적인 초상화를 그려주며 마음의 벽을 무너뜨렸다. 마리테레즈는 그 과정에서 피카소가 아주 유명한 예술가라는 것, 그리고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카소는 계속 속삭였다. “우리는 함께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마침내 마리테레즈는 그의 숨겨진 정부(情婦)가 되었다.
그 후 피카소는 마리테레즈와의 관계를 통해 청춘과 열정을 회복했고 타성에 빠져 있던 그의 그림도 활력을 되찾았다. 나중에 피카소의 전기를 쓴 친구 브라사이는 이렇게 증언했다. “피카소는 그녀의 금발, 빛나는 얼굴색, 조각 같은 몸매를 사랑했다. 그날 이후 그의 그림은 물결치기 시작했다.” 22살의 마리테레즈를 그린 <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분홍빛 젊음을 내뿜는 마리테레즈가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잠들어 있다. 엷게 미소 띤 입과 부드럽게 감은 눈에서 평온함과 나른함이 느껴진다. 코를 분기점으로 쪼개어진 얼굴은 마치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꿈을 형상화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 모습이 피카소가 본 마리테레즈였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꿈결같이 평화로운 쉼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바로 그게 문제가 되었다. 그녀의 유순한 성격은 답답함이 되었고, 한때 피카소가 찬미했던 자연스러운 모습은 투박함과 무식함의 증거가 되었다. 마리테레즈에게 싫증 난 피카소는 1937년 그녀와 정반대의 매력을 지닌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새 연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피카소는 도라 마르와 대놓고 연애를 즐기는 와중에도 마리테레즈에겐 희망고문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내 사랑, 여보.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소. 행복해지는 생각만 하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주겠소.” 그러나 피카소는 다시는 마리테레즈 곁으로 가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과 스캔들을 뿌리다 1973년 92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피카소를 기다리며 비혼으로 혼자 딸을 키우던 마리테레즈도 피카소 사망 4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딸에게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았다. “내가 저세상에 계신 네 아빠를 돌봐줘야 해.”
‘그루밍(길들이기) 성폭력’이라는 말이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욕을 충족하는 행위다. 그 결과 가해자의 학대 행위를 사랑이라고 믿는 피해자도 있다. 마리테레즈가 그랬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성범죄자들의 흔한 변명이다. 피카소가 그랬다. 피카소가 이룬 위대한 예술로도 그가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가리지는 못하리라. 그렇지 않은가?
▶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뉴스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