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실하긴 한데 수년째 학원 보내도 피아노를 못 쳐.. 우리 아이 알고보니 '느린 학습자'

남정미 기자 2019. 12.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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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IQ 71~84, 학급당 3~4명 달해
느린 학습자들이 서울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벽지 바르기, 제빵 등 직업교육을 받고 있다. /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신발 끈 묶는 법을 매번 알려줘도, 일주일이 채 가지 않는다. 피아노 학원에 수년을 보내도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한다. 영어 교과서 본문을 노트에 빼곡하게 따라 써봐도, 시험에서는 항상 꼴찌다. 과거에는 이런 아이를 보는 태도가 여러 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한다'며 무심하게 그냥 놔두기도, 다양한 교육과 치료를 통해 아이의 능력을 끌어올리려 노력하기도 했다. 아이를 지적장애라 판단하고 장애등급을 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특수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경계에 선 느린 학습자

최근 연구에서는 이들을 '느린 학습자'라 정의한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관련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으며,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시작됐다고 한다. 미국 정신장애진단 및 통계편람에 따르면 IQ 85 이상을 정상 지능이라고 봤을 때, IQ가 70 이하면 지적장애다. 느린 학습자는 IQ가 그 경계인 71~84에 있다. 이 때문에 느린 학습자를 '경계선 지능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직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연구 결과가 부족하지만, 미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13.59%가 이 경계선 지능에 있다고 본다. 이를 2010년 국내 통계청 자료에 적용하면, 15세 미만 93만4000명, 19세 미만 134만7000명에 해당한다. 일반 학교 학급당 3~4명 정도는 느린 학습자라는 것이다.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경우 많아

느린 학습자는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특수학급에 들어가기는 어렵고, 일반 학급에서는 방치되기 때문이다. 미국(2004년)과 영국(2010년)에서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일반 학생들보다 학교 중도 탈락률이 10배가 넘고 자살 시도율은 1.7배가 높았다.

느린 학습자는 학습 축적이 느리기 때문에, 일반 학습자보다 더 많은 반복이 필요하다. 또한 연결된 사고가 어렵기 때문에 단계별로 하나하나 알려줘야 한다. 손톱을 깎아도 발톱은 깎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 수십 명을 담당해야 하는 학교 현장에서는 이를 놓치기 쉽다.

특히 고등학교까지는 마치더라도, 대학은 끝까지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은 교실에 앉아서 짜인 시간표대로 수업을 듣는 초·중·고와 달리, 대학은 개인의 자율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느린 학습자 자녀를 둔 김미영(50·가명)씨는 "예상 문제를 달달 외우게 해, 수도권 4년제 대학 수시에 아이가 합격했다"며 "그러나 정작 스스로 강의 시간표를 짜서 수업을 듣는 것에 아이가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고 했다.

사회로 나오면 더 큰 문제

부모들은 "그래도 미흡하지만, 학교라는 울타리에 있을 때는 괜찮았다"고 한다. 사회에 나오면 이들이 갈 곳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느린 학습자 자녀를 둔 허명균(52)씨는 "느린 학습자의 경우 취업도 어렵고, 취업이 된다고 해도 일반 직장에서는 오래 일하기 어렵다"며 "그렇다고 지적장애인은 아니기 때문에 관련 시설이나, 지원 제도 등은 이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취업에 실패하고, 사회성 등이 떨어지는 이들은 결국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의 경우 군대라는 또 다른 산이 있다. 남성 느린 학습자의 경우, 상당수가 군대에서 관심병사가 된다.

낙인 대신 보듬어야

전문가들은 느린 학습자라 하더라도 이들의 특성을 조금만 이해하면 사회로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청년 느린 학습자를 연구하는 한신대학교 민주사회정책연구원 이재경 연구자는 "느린 학습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순수하고 일을 성실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며 "빨리빨리 돌아가는 일자리에는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런 장점을 좋게 봐주는 일자리에서는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다"고 했다.

느린 학습자 자녀를 둔 허씨 역시 "우리 아이들이 노인들에게는 인기가 좋다"며 "사회생활 경험이 적어 상대적으로 때가 덜 묻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고 했다. 허씨는 "느린 학습자 부모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노인 요양 보호사 등 아이들이 잘할 수 있는 분야의 교육을 하려고 한다"며 "사회에서도 이들을 느리다고 낙인 찍기보다 느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듬어 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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