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스스로 갇힌 여인.. 때론 죄수와 교도관도 우정 싹터요

의정부/김미리 기자 2019. 12.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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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미리 기자의 1미리]
섬 소녀였던 장선숙 교도관 '뭍의 섬' 교도소에서 30년
수감자들이 '엄마'라고 불러.. 사형수도 그녀 품에 안겨 울었다
의정부 교도소 철문 앞에 장선숙 교도관이 섰다. 옆으로 교도소 담장이 보인다. “교도관이 갖춰야 할 요건요? 법률 지식, 그리고 저 정도 덩치? 하하. 힘으로 수감자를 제압해야 할 때도 있어요.” 30년 담장 안팎을 오가며 쌓은 여유가 묻어났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내비(게이션)에 주소가 안 나와요. '의정부 교도소 앞 삼거리'라고 찍고 와야 해요." 지도엔 흔적도 없다. 있으나 없는 곳, 뭍의 섬이다. "외(外)정문 통과하면 내리시고요." 정문 밖에 정문이 하나 더 있다. 그게 외정문이다. 진짜 정문은 죄지은 자의 출입문, 외정문은 죄 없는 자가 드나드는 문이다. 이중(二重) 정문으로 바깥세상을 밀폐했다.

삼거리를 지나 좌회전했다. 바싹 잎이 말라붙은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다. 그 나무 터널 끝, 목적지 의정부 교도소가 나타났다. 공간이 뿜어내는 싸늘한 기운이 심리적 체감기온을 낮췄다. "이쪽요!" 우렁찬 음성이 적막을 동강 냈다. 교도관 장선숙(49)씨였다. 제복 어깨에 붙은 무궁화 두 개(교감·6급)가 눈에 띄었다. 만 스무 살부터 30년간 열두 척 담장을 넘나든 여인. 스스로 "30년째 교도소에 갇힌 사람"이라 우스개 한다. 최근 닫힌 철문 안 얘기를 담은 책 '왜 하필 교도관이야'(예미 刊)를 펴냈다. 그를 만나 담장 안팎 삶을 들었다.

섬 소녀, 뭍의 섬에 들어오다

―영화 속 교도관 이미지와 다르네요. 인상이 후덕해 보입니다(웃음).

"사복 입으면 평범한 아줌마예요. 사람들이 교도관은 머리에 뿔 난 사람인 줄 안다니까요.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세상이니 영화·드라마 속 이미지가 다라고 여겨요. 가혹 행위를 하는 악역 아니면 존재감 없는 접견장의 그림자. 같은 제복 공무원인 경찰, 소방관은 익숙한데 말이죠." 전국의 교도관 수는 1만6000여명. 이 중 약 8.8%인 1400여명이 여자 교도관이다.

―흔한 직업은 아니지요.

"옷 가게 가면 종업원이 감색을 자주 추천해요. 제가 '30년 제복 입었다. 감색은 질렸다'고 하면 상대가 '경찰이시구나' 해요. 말하기 뭐해서 '아, 네…그 비슷한 일' 하며 얼버무리죠. '언니, 뭐하세요?'라고 물어보는 미장원 주인에게 이실직고했죠, 교도소에서 일한다고. '교, 교도소요?' 말 더듬더군요. 열에 아홉 그런 반응이에요. 벽이 있어요."

―어떤 벽인가요.

"어떻게 보면 교도관은 수감자를 교화하기 위해 자유를 담장 밖에 영치(領置)하고 온 사람들이에요. 죄인이 아닌데 죄인처럼 외부와 차단된 곳으로 들어왔죠. '또 다른 재소자'라고 불리지요."

―많은 직업 중 왜 교도관을 택했나요.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희망이 없을 때 제 손을 잡아준 선생님이 계셨어요. 나도 누군가가 가장 힘들 때 손 내미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교도관이었습니다."

4000명 정도 사는 작은 섬 전남 신안 비금도 출신이다. 1남 4녀 중 막내. 20개월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어머니가 농사짓고 행상해 5남매를 키웠다.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지만 언니들처럼 중학교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손 내밀었다. "교대 합격하면 내가 등록금 대줄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하려무나." 학교 관사에서 선생님들 사이 끼어 자며 악착같이 공부했다. 결국 4년제 대학에 합격했지만 사립대였다. 등록금이 비싸 진학을 포기했다. 합격자 발표하던 날, 짐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1990년 교정 공무원 9급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교도관 한다니 주변 반응이 어떻던가요.

"초등학교 은사를 찾아뵀더니 첫마디가 '하필 교도관이냐'였어요. 섭섭했습니다. 어머니는 딸내미 일터를 봐야겠다고 교도소에 와 보시고 이런 데서 어떻게 일하느냐며 한숨 쉬셨지요."

―섬과 교도소. 둘 다 외로워 보입니다.

"검찰 수사관 출신인 이상길 작가와 친해요. 그분이 제 삶을 보고 '꿈을 찾아 비금도라는 섬을 탈출한 소녀가 결국 걸어 들어간 곳이 뭍의 또 다른 섬인 교도소였다'고 했어요. 제가 섬 떠나 못 사는 운명 같다면서(웃음)."

―20대 초반, 한창 꿈 많은 나이에 잿빛 감옥으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참 고됐어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FM으로 살아온 제가 죄지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 괴로웠어요. 3부제 교대 근무도 힘들었고요. 환경도 열악했어요. 수감자들은 난방된 방에서 자는데 우리는 복도에 연탄 난로 하나 놓고 바들바들 떨었어요." 현실을 떨쳐 버리려고 혼자 등산을 다녔다. 눈 오는 어느 겨울날 도봉산에 올랐다. 아이젠을 못 달고 있으니 옆에 있던 산악회 사람이 도와줬다. 소방관이었다. 그 사람이 남편이 됐다.
사형수 면회 간 괴짜 교도관

1990년 첫 발령지가 의정부 교도소였다. 서울지방교정청,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보낸 6년을 제외하고 2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지금은 여성 수용팀장. 여성 수감자 130여명을 관리한다. 매일 오전 8시 15분, 오후 4시 45분 전체 인원 점검을 한다.

―수감자들이 '엄마'라고 부른다고요?

"가끔 '애'들이 그렇게 불러요. 남자 수감자들은 '인자한 어머니, 누님 같은 계장님'이래요. 한 번도 '예쁜 계장님' 소리는 못 들었네요. 어떤 여자 교도관은 팬레터도 받던데(웃음). 애들한테는 보호자 같을 거예요. 아침저녁 얼굴 보는 사이니까. 엄마는 잘해주기만 하진 않지요. 혼내기도 하고, 힘들 땐 보듬어 줍니다."

습관적으로 수감자를 '애'라고 불렀다. "담장 안 애들 챙기느라 담장 밖 진짜 우리 애들은 제대로 못 챙겼다"고 했다. 찾는 가족 없는 이를 위해 영치금을 대신 넣어 준다. 편지도 종종 써준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교도관조차 신기한 표정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은 합니다. 실제로 되던가요?

"처음엔 저도 범죄자로만 봤어요. 점점 시간이 흐르니 그 사람들 내면이 보였어요. 죄질은 나쁜데 들여다보면 사람은 흉악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물론 진짜 악한 사람도 있고요. 수용자를 일거리로 대하지 말고 '먼 미래의 우리 이웃'이라 생각하자, 인격체로 존중하자 마음먹었습니다."

마음만으로는 돕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전공해 법률 지식을 채웠다. 수감자 취업 담당이었을 땐 경기대 직업학과에 진학해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노력을 인정받아 2015년 교정 대상을 받았다. 교위에서 교감으로 특진했다.

초년병 때부터 별종으로 통했다. 1991년 유괴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수감자를 호송했다. 선고받은 날, 먹빛으로 변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화장실에서 포승줄과 수갑을 잠시 풀어주는 것이었다. 무너져 내린 그녀가 장씨 품에 안겨 오열했다. 그녀가 다른 구치소로 이송된 뒤에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한번은 면회를 갔는데 교도관이 장씨 명찰을 보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당신이 장선숙이야? 또○○인 줄 알았는데 멀쩡하게 생겼잖아. 어떻게 교도관이 사형수한테 편지 쓸 수 있지?"

―사형수에게 측은지심이 발동한 건가요.

"저는 그 친구가 세상 하직하기 전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 한 명으로라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연은 여섯 달만 이어졌다. 한 달에 한 번, 죽기 전까지 딱 여섯 통의 편지가 왔다. "그 친구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부치려는데 동기에게 전화가 왔어요. 전날 사형이 집행됐다고." 부치지 못한 카드는 사형 폐지 운동을 하던 수녀님께 대신 보냈다.

―인생의 부조리극이 넘치겠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선 피해자, 가해자 모두 가족입니다. 결국 살아 있는 아들을 용서하더군요. 사연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때로 환멸을 느끼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교도소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얼굴이 꽤 익숙한 노역수가 들어와서 자세히 보니 서점에서 같이 아르바이트했던 언니였어요. 우리 집에서 자기도 했어요. 맘이 복잡해졌습니다. 교도관이 그래서 의심이 많습니다."

―다른 직업병은 없나요?

"수용자 가슴에 붙은 네 자리 수감번호를 달달 외웠죠. 수학엔 젬병인데 지금도 차량번호, 휴대폰 끝 번호처럼 네 자리 숫자는 귀신같이 외웁니다."

가장 보람 느꼈던 순간을 묻자 장선숙 교도관은 “출소자 딸이 엄마를 도와줘 고맙다면서 나 같은 교도관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라고 했다. 어려웠을 때 손 내밀어 준 학창 시절 선생님처럼 그녀도 누군가의 본보기가 됐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출소자 '단톡방' 방장

―출소자와도 잘 지냅니까.

"출소자 넷과 하는 4년 된 단톡방이 있어요. 이름을 '마중물'로 지었어요. 마중물이 펌프질할 때 처음 붓는 물이잖아요. 제가 그들이 사회 나와 적응하는 데 한 바가지 마중물 역할을 해주겠단 의미였어요. 지금은 이 친구들이 저한테 마중물이 됐어요. 착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2년 전 비슷한 모임을 또 하나 만들었거든요. 이 단톡방 이름은 '동부녀'. '동부구치소에서 만난 여인들' 준말인데 '동기 부여하는 여인방'이란 의미도 담았죠. 비슷한 또래 아기 엄마 출소자 둘을 묶은 방이에요."

―죄수와 간수가 친구가 된다는 건데, 가능한가요?

"진짜 친구가 되기도 해요. '담장 친구(교도소에서 만난 사이)'인데 남편은 저를 그냥 '아내 친구'로 알기도 하고, '우리 엄마한테 친구는 이모밖에 없어요'라는 출소자 딸도 있어요. 투병 중인데 자기 죽으면 아이 결혼식 대신 가달라는 친구도 있고요."

―배신당할까 봐 두렵진 않습니까?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도 교도관의 역할일 텐데요.

"진심으로 다가가는 사람의 마음을 저버리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수용자 중 마음에 담는 이는 10% 정도입니다. 이 가운데 재범 저질러 다시 들어온 경우는 딱 두 번 있었습니다."

죄수에게 독서 전파하는 활자중독자

―수감자들에게 시, 소설을 많이 읽힌다고요?

"인터넷이 거세된 폐쇄된 공간이에요. 텍스트가 위력을 발휘해요. 교도소가 삶의 밑바닥 같지만, 마음먹기 따라 자신을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심연이 될 수 있어요. 책이 큰 역할을 합니다." 개인별 맞는 책을 추천하고 독후감을 쓰게 한다. 그가 강조하는 '슬기로운 감방생활' 노하우 세 개는 독서, 명상, 글쓰기다.

―원래 독서, 글쓰기를 좋아했나요.

"돈 벌러 육지로 나간 언니들이 전신환 넣어 편지를 자주 보냈어요. 우체부 아저씨를 목 빠져라 기다렸다가 아저씨가 동네 한 바퀴 돌아 섬을 빠져나갈 때 맞춰 답장을 후다닥 썼어요. 글쓰기 연습이 절로 된 것 같아요." 예매해둔 고향행 기차표를 책갈피 삼아 휴가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책장 넘기기도 했다. 요즘도 한 달에 열 권은 읽는다. 지시 사항 대신 시를 프린트해 주기도 한다. 얼마 전엔 김승희 시인의 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를 프린트해 방마다 붙여줬다.

―'엄마 죄수'도 많겠습니다.

"아이 떼놓고 들어온 친구들이 많아요. 과거엔 '외국 갔다, 아파서 병원에 있다'고 둘러댔는데 요즘은 그게 안 돼요. 외국도 휴대폰 팡팡 터지잖아요. 휴대폰 안 되는 데가 교도소밖에 없어요. 애들이 크면 이해할 만한 정도로 얘기해 주는 게 낫다고 조언합니다."

남자 수감자 대상 취업 교육을 할 때 강연자로 여자 출소자를 부른 적이 있었다. 입대 앞둔 아들이 자진해서 따라왔다. "엄마가 교도소 있을 때 '사기꾼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참 많이 받았어요. 여러분보다 더 맘고생 하는 가족들이 밖에 있습니다. 그분들 다시 고통받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아들의 호소에 울음바다가 됐다.

―보람 느꼈던 순간을 꼽는다면요.

"어떤 사람이 민원실 앞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가봤더니 사기 사건으로 복역한 사람이었어요. 면회 오는 사람이 없어 제가 영치금 좀 넣어주고, 경찰서에서 시설에 보낸 아이 행방을 알아준 게 두고두고 고마워 수소문 끝에 찾아왔다고 했어요. 한참 얘기 중인데 뒤에서 중학교 2학년 딸이 쑥 나왔어요. 딸 아이 꿈이 교도관이라는 거예요. 엄마가 힘들 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면서 저 같은 교도관이 되고 싶다더군요. 이후에 또 왔는데 과학고에 들어갔더라고요. 말은 '공부 잘하는 애가 무슨 교도관이냐, 판사·변호사 돼야지' 했는데 뭉클했어요."

담 허물고 '만기 출소'를 꿈꾸다

―책 마지막 부분에 출소자가 쓴 추천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동부녀' 멤버예요. 출판기념회에 아이도 데리고 왔어요. 며칠 뒤 동부녀 집들이도 갈 거예요."

―책을 쓴 이유가 뭔가요.

"'교정(矯正)은 대한민국의 자궁'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곳이란 의미죠. 산파(産婆)가 교도관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선 교도관이 무슨 일 하는지 잘 모르고, 교도관 스스로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요. 안타까웠어요. '따뜻할 온(溫)'자가 '갇힌 자(囚)에게 물(水) 한 그릇(皿) 준다'는 의미래요. 교도관은 수감자에게 물도 주고,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니 따뜻함을 넘어 뜨거운 사람 아닌가요(웃음)."

목표가 또 있다. "출판기념회 때 '마중물' 친구들이 왔다가 중간에 자리를 떴어요. 전과자인 걸 알아볼까 봐 두렵다면서. 맘이 아팠습니다. 교도소 담장보다 더 높은 게 수감자들이 스스로 마음에 친 옹벽, 세상이 그들에게 쌓은 편견이라는 철옹성이에요." 이 담을 다 허물고 정년 채워 10년 뒤 '만기 출소' 하는 날 외치고 싶단다. "교도관 하길 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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