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왜 정변을 일으켰나?
[고구려사 명장면-85] 642년 10월, 고구려 장안성 남쪽 벌판. 동부의 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과 그의 병사들이 열병식을 벌이고 있었다. 초대받은 대신들 100여 명이 함께 참석했다. 한창 열병식이 고조되어가던 즈음 어디선가 낯선 호각과 북이 울리자, 갑자기 병사들의 행동이 돌변하였다. 칼을 빼든 병사들은 대신들을 살육하기 시작하였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대신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쓰러져 갔다. 순식간에 열병식장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피로 범벅된 군사들의 맨 앞에는 연개소문이 있었다. 대신들을 모두 살해하였음을 확인한 그는 군사들에게 외쳤다.
"왕궁으로 쳐들어가 건무왕(영류왕)을 처단하자."
이미 이들을 막을 군사들은 없었다. 궁궐에 난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찾아 살해하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동생 대양(大陽)의 아들 장(臧)이 새 고구려왕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왜 이렇게 잔혹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당서' 등 중국 측 기록에는 여러 대신들이 영류왕과 더불어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몰래 의논하였는데 그만 이런 모의가 누설되어, 연개소문이 반격을 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중국 측 기록을 옮겨온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류왕 25년(642년)에는 좀 다른 내용이 있다.
"(영류)왕은 서부(西部) 대인(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이 기사의 장성은 곧 천리장성을 말한다. 영류왕이 연개소문을 멀리 요동 방면에 장성 축조를 감독하라고 내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도 중앙정계에서 멀리 보내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되지만. 중국 측 기록처럼 대신들과 연개소문을 살해하려고 모의했다는 내용은 아니다. 이 기사가 고구려 자체에서 전승되어 온 기록으로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중국 측 기록이나 고구려 국내 전승 기록이나 영류왕 및 대신들과 연개소문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죽고 연개소문이 부직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이렇게 전한다.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로 죽자, 당연히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 자리를 계승해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연개소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하여 그가 대대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면서 임시로라도 일단 대대로 자리를 맡겨주고, 만약 일을 잘못하면 그때 물러나겠다고 청하니, 그때야 사람들이 관직의 승계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연개소문과 대신들과의 갈등은 연개소문의 부직 승계 과정에서 크게 불거졌다. 중국 측 기록에는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여 대신들이 반대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쿠데타 이후 연개소문의 행적을 통해서 갖게 된 선입관이나 혹은 당의 입장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에는 중국 측 기록과는 다른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한 대목을 전하고 있다.
"(연개소문이)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앞서 연개소문의 성격이 잔혹하다는 입장과는 제법 다른 이미지이다. 또 연개소문에 대해 부정적인 묘사로 일관하였던 '구당서'조차도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형체가 걸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저런 기록을 모아보면 연개소문은 외양이나 성격에서 나름대로 영웅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듯하다. 더욱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라는 표현은 그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풍모를 타고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기록만으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중국 측 기록대로 영류왕 대신들이 그를 살해하려고 모의한 데에 따른 반격이라면 쿠데타를 납득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류왕과 대신들까지 나서서 모의할 정도로 당시 연개소문의 위상이 대단히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개소문의 부직 승계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보면 연개소문이나 그의 가문에 대해 당시 중앙정계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부직 승계를 아예 가로막은 것은 아니어서 결국은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이를 직접적인 이유로 삼기는 곤란하다.
부직 승계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한 연개소문이 본래 성격이 잔혹하였기 때문에 대신들과 영류왕을 살해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열병식에 대거 참여한 것을 보면, 그에 대해 그리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연개소문을 살해하려고 모의한 영류왕과 대신들이라면 아예 연개소문의 군사권을 박탈하는 조처를 사전에 취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류왕이 642년 그해에 장성 축조 감독의 책임을 연개소문에게 맡긴 것도 어느 정도의 군사권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보면 영류왕 역시 연개소문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연개소문의 쿠데타에는 좀 더 복잡한 정계의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일본서기'에 전해지는 기사를 보면 좀 다른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고구려) 사신들이 말하기를 "지난해 6월에 동생 왕자(대양)가 죽고, 추 9월에 대신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연개소문)가 대왕(영류왕)을 살해하고 더불어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인을 죽였다. 이내 동생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자기와 같은 성(姓)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4 황극천황 원년 2월조)
위 기사는 642년 일본에 도착한 고구려 사신이 연개소문의 정변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이 기사에서는 다른 자료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내용 세 가지를 전하고 있다. 첫째 연개소문의 정변을 전하면서 먼저 그해 6월에 영류왕 동생 왕자 대양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양의 죽음과 연개소문의 정변 사이에 모종의 정치적 연계가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 정변 이후 대양의 아들 보장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양 세력 사이에 긴밀한 정치적 연합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연개소문이 언제 아버지 직임을 승계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642년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의 책임을 맡긴 때가 언제인지도 불명확하다. 연개소문과 대양왕자 사이에 정치적 연계도 연개소문 아버지 때의 일인지, 아니면 연개소문 당사자의 뜻인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연개소문의 부직 승계가 그리 원활하지 않았을 때 대양왕자가 적극적으로 연개소문을 지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연개소문과 대양왕자 사이에 정치적 결속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둘째,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살해한 대신 180여 명 중 대표자가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라는 점이다. 연개소문 이름의 일본서기 표현이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인데, '이리(伊梨)'씨 곧 '연(淵)'씨이다. 당시 살해한 대신의 대표자 '伊梨渠世斯' 역시 '이리(伊梨)' 즉 '연(淵)'씨로서 연개소문의 같은 성씨 가문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일본서기' 기사는 의문이 없지 않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같은 성(姓)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름으로 볼 때에는 都須流金流보다는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가 동성으로 생각된다. 혹 두 사람의 이름이 뒤바뀐 것은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지만, 별 근거 없이 위 기사에서 두 인물을 바꾸어 해석하기는 어렵다. 일단 위 기사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킬 적에 자기 가문의 가장 유력한 인물을 숙청했던 것이다. 이처럼 연씨 가문 내에서도 연개소문과 뜻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는 세력이 있었던 셈이다.
셋째,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같은 성(姓)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연개소문이 정변의 주역이고 실권자임은 당나라에서도 즉시 파악할 정도로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명분상으로는 연개소문이 한발 뒤로 물러나있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도수류금류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연씨 가문 인물로서 살해된 대신들의 대표인 이리거세사와는 달리 연개소문을 지원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같은 연씨 가문 내에서도 향배가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집권 직후 연개소문은 왜 한발 물러나 있었을까? 왜 가문의 다른 인물을 내세웠을까? 현재로서는 별다른 자료가 없어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개연성을 생각해보고 싶은데, 다름 아닌 연개소문의 나이이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지만, 642년 정변 시에 연개소문이 몇 살인지는 알기 어렵다. 장남인 남생이 634년생이니, 연개소문은 8세 정도 아들을 둔 나이였다. 남생이 15세 정도에 아들을 두었고, 또 광개토왕이 20세에 장수왕을 얻었던 사례를 보면 대략 15~20세 무렵에 결혼했다고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이 20세에 결혼했다고 치면 642년 정변을 일으킬 때에 28세 정도, 즉 아직 30세가 채 안 된 나이였다.
그 시절이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30세가 채 되기 전에 최고 집권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그리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게다. 물론 지난 회에서 당 태종이 18세에 아버지 이연을 도와 거병하고 29세에 황제에 올랐음을 생각하면, 전혀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는 없겠다. 하지만 혈통을 잇는 황제의 경우와 일반 신료의 경우는 좀 다르다.
연개소문이 아버지 직을 잇는 과정에서 나타난 대신들의 부정적인 태도는 어쩌면 연개소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직 그가 막리지나 대대로 등의 최고위 직임을 맡을 만한 경륜 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은 영류왕을 포함하여 대신 100여 명을 살해한 대규모 정변이다. '일본서기' 기사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180여 인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사신의 전언이기 때문에 어쩌면 '일본서기' 기사의 180여 명이 실제 숫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정도 숫자라면 아마 당시 대신급 인물 거의 대부분을 제거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당시 상대적으로 소장급인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국을 운영할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보다는 원로급 인물인 도수류금류를 앞에 내세웠던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180여 인의 대신을 제거한 정국은 연개소문의 독점적 권력이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개소문 정권의 인적 기반이 매우 취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645년 당 태종의 침공 시에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15만 군대를 보내면서 욕살 고연수와 고혜진을 사령관으로 삼아 출정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소장급들로서 당시 군대 내부에 있던 원로인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의 조언을 무시하고 전투를 벌이다가 대패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 중앙정계가 젊은 소장급 인물들로 채워져 있음을 반영하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연개소문의 정변은 어쩌면 소장파들과 중견 원로파들 사이의 갈등과 대결 구도에서 발생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는 대왕왕자가 이들 소장파를 뒤에서 지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연개소문 개인의 의지와 욕망만이 아니라 소장파와 장년 대신들 사이의 갈등, 요새식으로 얘기하면 세대 간의 갈등이 그 배경에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642년 10월, 쿠데타가 일어난 그날 수도 장안성의 주인공들이 하루 만에 바뀌었다. 영류왕과 100명이 넘는 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과 소장파 관료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어떻게 이끌어 갔을까? 이제 쿠데타 이후가 고구려의 국운을 좌우하게 되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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