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청년 100명 중 "성공이 중요" 단 1명 밖에 없었다

정환봉 2019. 12.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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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 ④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각자도생, 갈 길 험난하지만..
"미래 삶은 개선 가능성 있다" 69명
비관적 응답은 100명 중 5명 그쳐
가장 중요한 건 '건강, 경제적 안정'
성공 기대보다 실패 두려움 더 커

청년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담론은 2007년 우석훈과 박권일의 공저서 <88만원 세대>에서 본격화했다. 2011년 <경향신문>은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는 뜻으로 ‘삼포세대’라는 조어를 만들었다. 삼포세대는 이후 취업과 내 집 마련, 인간관계와 희망, 건강과 외모 관리, 삶까지 포기한다는 ‘십포세대’로 나아가더니, 종국엔 무한대를 뜻하는 ‘엔(n)포세대’로 확장했다. 늘어만 가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역설적으로 청년들이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은 지역과 성별, 학력과 학벌 등으로 분화해 있는 19~23살 청년 100명이 저런 담론들에 대해 실제로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듣기 위해 심층 인터뷰와 설문조사에 나섰다. 그런데 얼핏 의외이면서도 자세히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결과가 나왔다. 100명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복수 응답)고 묻자, 127개의 서로 다른 응답 항목 가운데 ‘건강’(35건)과 ‘경제적 안정’(34건)이 압도적으로 많이 꼽혔다. 그다음에 ‘가정’이 15건으로 뒤를 이었다. ‘자아실현’과 ‘성공’ ‘성장’은 각각 1건뿐이었다. 그나마 ‘성취’가 10건으로 네 번째로 많은 축에 속했다.

삶에서 건강과 경제적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성공에 대한 기대보다 실패의 공포가 더 큰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가정이 그다음으로 꼽힌 것도 마찬가지다. 건강과 경제적 안정, 가정이 꼽힌 것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버팀목이 사회의 의료나 복지 지원 체계가 아니라 자기 관리와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 그리고 가정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각자도생과 자력구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청년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100명의 청년에게 ‘미래에 자신의 삶이 더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자 69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보통’이라고 답한 사람은 26명이었고,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5명뿐이었다. 대부분의 청년은 사회가 비추는 조명이 없는 곳에서도 치열하게 자기 삶의 장면들을 만들고 있었다. 뷰티숍에서 ‘알바’를 하는 스무살 송수경(가명)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미래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 같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송수경은 서른살쯤에 서울 청담동에 자신의 이름을 건 메이크업숍을 차리는 것이 꿈이다. 송수경은 그 꿈을 위해 대학 대신 경력을 택했다. “메이크업 업계는 학력보다 경력이 중요해요. 4년제보다 2년제를 나온 사람들이 더 많은데, 2년 동안 차라리 경력을 쌓는 게 더 낫다고 주변 디자이너분들이 이야기해줬어요. 일찍부터 시작하기로 했죠.”

그는 1주일에 3일은 저녁 6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학원에서 메이크업을 배운다. 현장 실습도 나간다. 주말에는 뷰티숍에서 알바를 한다. 국가 메이크업 자격증과 민간에서 발급하는 속눈썹 연장 2급 자격증을 땄고, 취업 준비도 하고 있다. 학원에서 더 배우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곧 취업할 수 있다고 송수경은 믿는다. 물론 송수경은 공정한 사회가 올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늘 불공정했는데, 더 노력한다고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만큼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의 노력과 피땀이 언젠가는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확신이 있어요.”

_________ ‘내 몸 하나 건사할 수 있는 삶’을 꿈꾼다

충남 천안 상명대에서 사진학을 전공하는 스물두살 유수민의 꿈은 프리랜서 사진작가다. 어릴 적 아버지의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으며 재미를 붙였다. 그는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수민이 이야기하는 성공은 한국 사회에서 보통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남들 위에 군림하는 삶’ 같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다. “삶에서 중요한 건 무척 많죠. 돈도 중요하지만 저는 제 명예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돈과 명예라고 하니까 거창한 것 같은데 큰 건 아니에요. 떼부자가 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제가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먹고 싶은 것 먹고, 사고 싶은 것 살 수 있는 정도. 명예도 마찬가지로 그냥 제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면 충분한 거 같아요.”

한신대에 다니는 스물한살 안도연도 ‘하고 싶은 걸 접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력’을 이야기했다. 애초 미대 입시를 준비했던 안도연은 재수를 하면서 ‘취업이나 학벌에 따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고 한다.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철학과가 있는 대학에 수시를 다 넣었고 지금 학교에 합격했어요. 들어와 보니 친구들도 교수님들도 다 너무 좋아 만족해요.”

안도연은 대학생활 만족도를 묻는 말에 10점 만점 중 9점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 언론사 입사 준비도 곧 시작하려고 한다. ‘문송합니다’(문과 취업이 어려움을 빗대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의 대표로 꼽히는 철학과에 다니지만 큰 걱정이 없어 보였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 즐거운 삶인데 그게 되게 어려운 것 같아요. 먹고사는 것 때문에 관심 없는 일을 하는 것은 싫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거나, 그게 안 되면 하고 싶은 걸 접지 않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삶을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이 100명의 청년을 만나서 느낀 건 이들 중 다수가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 같은 삶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저 스스로 열광하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그 열광을 꺼트리지 않아도 될 경제적 안정을 성공과 성취로 여기고 있었다. 4명의 기자가 1만㎞를 오가며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나눴다. 이런 정도의 삶을 꿈꾸는 청년들조차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사회를 과연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저들을 각자도생과 자력구제의 구렁텅이에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김혜윤 김윤주 서혜미 강재구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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