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영 기수'에서 추락까지, 비운의 기업인 김우중 별세

문희철 입력 2019. 12. 10. 01:52 수정 2019. 12. 10.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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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국 산업화의 주역이었지만 압축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중앙포토]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국 산업 발전을 이끈 거목이자, ‘세계 경영’을 주창했던 글로벌 경영인이었다. 다른 대기업들이 일제강점기 이후 불하(拂下) 자산으로 성장했던 것과 달리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1960년대 산업화 이후 대규모 기업집단을 일군 성공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단돈 500만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해 대우그룹을 자산 규모 76조원, 재계 순위 2위(1998년)까지 키워냈지만 외환위기 이후 40조원 넘는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중 분해됐다. 1999년 중국으로 떠나 2005년 귀국하기까지 영국·베트남 등을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국 기업의 1세대 경영인으로 극적인 성공신화와 추락까지 겪은 비운의 인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그는 경기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근무하다가 1967년 서울 충무로에 ‘대우실업’을 세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무역 위주의 사업 확장으로 당시 한국의 주 생산품목이던 섬유·의류 등을 수출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는 증권·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70년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에 발맞춰 중공업·조선·자동차 등으로 그룹의 외연을 넓혔다.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를 달성했고, 10여년 만에 현대그룹·삼성그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74년 전자제품 무역업을 위해 만든 대우전자는 80년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광진전자공업 등의 인수와 함께 금성(현 LG)·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3대 가전사로 성장했다.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만든 대우자동차는 중동에서 구 소련, 아프리카까지 전세계에 팔리는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이었다.

1988년 대우조선 옥포조선소에서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80년대 후반 소련 붕괴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됐다. 한국기업으론 독보적으로 동유럽, 중동·아프리카·남미 등에 진출했다. 이즈음(89년) 펴낸 책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다. 출간 당시 6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려 최단기 ‘밀리언 셀러’ 기네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93년엔 ‘세계경영’을 주창하며 그룹의 모체인 무역업은 물론 자동차와 중공업 수출로 큰 성공을 거뒀다.
‘기술이 없으면 사오면 된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 등 공격적인 사업 스타일로 유명했다. 고집이 셌지만 다른 재벌 창업자들과 달리 전문경영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해결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사분규로 대우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1년 반 동안 옥포 조선소에 머물며 현장경영을 지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세계경영을 주창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년 중 3분의2를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해외 진출에 공을 들였다. 1990년대 전용기 내에서 회의 중인 김 전 회장의 모습.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외환 위기는 이런 경영 스타일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부채 규모가 눈더미처럼 불어난 상황에서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 경영으로 맞섰지만 자금난과 분식회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99년 그룹은 해체됐다. 2000년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기업회생)에 들어가면서 대우그룹은 사라졌다. 해체 전까지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을 보유했다. 국내서 10만명, 해외서 25만명을 고용하며 21개 국가에 진출했다. 1998년 당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이었다.
2005년 귀국 후 검찰에 구속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중앙포토]
2005년 귀국한 뒤엔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2010년부터 글로벌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양성사업에 매진했다. 하노이에서는 전·현직 대우그룹 임직원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에서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을 운영한다. 한국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동남아 현지에서 무료로 취업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서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했다.

대우그룹 전직 임직원들은 등산모임·골프모임·학술모임·경제 동향 강연을 듣는 대우포럼 등 다양한 소모임에서 교류하고 있다. 손명규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이사는 “통상 소모임에 대우 출신 임직원들 60~80여명이 모인다”며 “대우라는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청년 사업가를 양성하거나 해외 진출을 추진하는 중소기업에 컨설팅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 3월 대우 창업 50주년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 전 회장이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 때가 마지막이 됐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소]

고 김 회장에겐 샐러리맨 성공신화와 한국 무역의 주춧돌이 됐다는 긍정적인 면과 산업화 시대 개발 일변도의 구태 경영이 추락을 자초했다는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일각에선 외환 위기 이후 대우그룹이 ‘희생양’이 됐다며 그를 동정하는 시선도 있지만, ‘세계 경영’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산업화 시대에나 가능했던 후진적 경영 행태였다는 비판도 많다.

문희철·임성빈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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