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연개소문, 알고보니 금수저

임기환 입력 2019. 11. 2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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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84] '풍운아(風雲兒)'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휘몰아가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행적을 드러내는 인물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혹시나 해서 국어사전을 찾아 보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례와는 좀 다른 뜻이다.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세상에 두각을 내는 인물이야 당연하지만 '좋은 때를 타고'에 방점을 찍고 보니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해석되어 좀 싱거워졌다. 국어사전의 뜻은 잠시 무시하고 통상 쓰는 풍운아라는 뜻으로 사용하련다.

우리 역사에서 풍운아라는 말을 붙인다면 누가 먼저 떠오르는가? 여러 인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겠지만,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중에 끼워 넣는 독자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연개소문이 활동하던 7세기가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여러 차례 격랑이 휩쓸고 지나가고 있던 격변기라는 점은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이러한 격동기에는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였던 수많은 군웅들이 등장하게 되고, 후대의 역사서에서는 그들의 부침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운위하기 마련이다.

그중 연개소문은 역사상 국내외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온 인물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사실 연개소문만이 아니라 7세기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우리가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인물쯤 되면 모두 풍운아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풍운의 시대'를 살아간 인물 중에 풍운아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연개소문은 국어사전의 정의에 오히려 더 어울리는 풍운아이기도 하다. 앞서 '좋은 때를 타고'라는 사전적 풀이에 '팔자 좋은'이라는 해석을 붙였는데, 연개소문이야말로 정말 '팔자 좋은' 요새식으로 얘기하면 금수저, 아니 다이아수저쯤 입에 물고 태어난 팔자였다.

연개소문이라는 이름값과 달리 연개소문 자신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고구려 자체의 전승은 매우 드물고,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은 중국 측 자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중국 측 기록은 거의 대부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에서 만들어진 문헌들이다. 당연히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들 자료를 이용할 때 이런 점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연개소문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게 아니다. 사료에 대해 엄격한 실증적 태도를 견지하자는 뜻이다. 사실 필자만큼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에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연구자도 별로 없을 게다.

먼저 금수저 연개소문의 내력 즉 출신 가문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터인데, 막상 그의 가문에 대한 기록은 그나마 더 적어서 '신당서' 고려전에 실려 있는 단 한 줄뿐이다.

"개소문(蓋蘇文)은 개금(蓋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은 천씨(泉氏)인데, 스스로 물속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아버지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하였으나, 성질이 포악한 그를 미워하여 사람들이 세우지 않았다."('신당서' 권220 고려전)

위 기록에서도 천씨라는 성과 그 성씨의 내력, 그리고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동부대인 대대로라는 지위에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천(泉)이란 성씨는 잠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 측 기록에는 연(淵)씨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옳다. 중국 측 기록은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의 '淵'을 피하여 비슷한 뜻을 가진 천씨 고친 것이다. 이 기록을 갖고는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동부에 소속되어 있고, 또 당시 고구려 최고 벼슬인 대대로를 역임한 인물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영류왕 25년(642)에 연개소문을 "서부(西部)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는 동부대인인데, 아들은 서부대인이라니 앞뒤가 다소 맞지 않아 이런저런 논란도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1923년에 중국 낙양(뤄양)시 북망산에서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男生)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그 뒤로 셋째 아들 '천남산(泉男山) 묘지', 남생의 아들 '천헌성(泉獻誠)묘지' 등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가문 후예들의 묘지가 전해지면서 연개소문 가문에 대해 좀 더 풍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중 '천남생묘지'에 가문의 정보가 자세한 편인데, 이 자료도 묘지라는 매체가 갖는 특성, 그리고 멸망한 나라의 망명귀족 집안들이 타국에서 남기는 기록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

"공의 성은 천(泉)이고 이름은 남생(男生)이며 자는 원덕(元德)으로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샘(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신(神)에 의탁하여 생겨난 데에 따라 성씨를 불렀다. … 증조부 자유(子遊), 할아버지 대조(大祚)는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직임을 맡았고, 아버지 개금(盖金·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의 직임을 맡았으니, 조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良冶良弓) 군사권을 아울러 쥐고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하였다."('천남생묘지')

이 묘지에서는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子遊), 아버지 대조(大祚)가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대대로를 역임하였다는 '신당서' 고려전과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막리지나 대대로나 고구려 말기 최고위 관직이라는 점에서 그의 가문이 당시 실세인 최고 명문가라는 점은 틀림없다. 그러면 할아버지 자유와 아버지 대조는 언제 활동했던 인물들일까? 일단 확실하게 알고 있는 남생의 탄생년으로부터 거꾸로 추적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남생묘지

묘지에 의하면 남생은 634년생이다. 그때 아버지 연개소문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역시 남생의 행적으로부터 유추할 수밖에 없다. '천헌성묘지'에 의하면 남생은 651년에 첫아들을 얻었다. 따져보면 대략 남생은 15세 정도에 결혼한 셈이 된다. 아마 15세 무렵이 당시 결혼 연령이었던 모양인데, 이를 적용한다면 연개소문의 출생년은 대략 618년 전후가 된다. 영양왕 말년이나 영류왕의 즉위 무렵이다. 아버지 대조가 죽어서 대대로의 지위를 연개소문이 잇게 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연개소문도 맏아들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결혼 연령으로 계산하면 아버지 대조의 출생년은 대략 600년 전후, 즉 영양왕 재위 초년이다. 이렇게 따져 올라가면 할아버지 자유의 주된 활동 시기는 영양왕 때, 아버지 대조의 활동 시기는 영류왕 때임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단순 계산이기 때문에 대략 연개소문 가문은 평원왕 후반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보면 그리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연개소문의 사례에 의해 아버지의 지위를 큰아들이 세습했던 점을 고려하면 연개소문의 아버지 대조도 할아버지 덕분에 막리지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연개소문 가문을 크게 일으킨 주인공은 역시 할아버지 자유인 셈이다. 그의 활동 시기가 영양왕대임을 고려하면, 문헌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도 수양제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게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겠다. 고구려의 운명 아니 동아시아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전쟁을 치렀으니, 어찌 당시 고구려에 공을 세운 인물들이 많지 않겠는가. 그중에서도 자유는 막리지라는 최고위 관에 오른 것을 보면 그 공훈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할아버지 자유 때부터 그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고 한다면, 연개소문 가문은 신흥귀족 가문이었을까? 마침 '천남생묘지'가 발견된 1923년 중국 낙양 북망산에서 같은 고구려 출신 인물인 고자(高慈)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묘지에 의하면 고자의 증조부 고식(高式)은 2품 막리지(莫離支), 할아버지 고양(高量)은 3품 책성도독(柵城都督)에 위두대형겸대상(位頭大兄兼大相)을 지내고 아버지 고문(高文)은 3품 위두대형에 장군을 지냈다고 한다. 연개소문의 가문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최고의 명문가임은 틀림없다. 할아버지 고양이 증조부 고식의 막리지 자리를 승계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큰아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고식의 이른바 장손은 연개소문이 활동할 때까지 계속 막리지를 세습받았을 수도 있다. 역시 고자 가문 전체로 보면 연개소문 가문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음직하다.

고자묘지

그런데 이 묘지에 가문의 내력을 기술하면서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잠시 살펴보자.

"공의 이름은 자(慈)이고 자(字)는 지첩(智捷)이며 조선인이다. 선조가 주몽왕을 따라 해동의 여러 오랑캐를 평정하고 고려국을 세웠다. 이후 대대로 공후재상이 되었다. 후한 말엽에 이르러 고려와 연(燕)의 모용(慕容)이 전쟁을 벌여 크게 패하여 나라가 장차 멸망할 지경이 되었는데, 20대조 밀(密)이 창을 잡고 홀로 뛰어들어 목을 벤 자가 매우 많았다. 이렇게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나라를 보존하였다. 은사를 내려 왕에 봉하였으나 세 번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이로써 고(高)씨 성과 식읍 3000호를 내려주고, 다시 금문철권(金文鐵權)을 하사하였다."

고자 가문의 선조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왕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고 하고, 또 20대조 고밀은 모용씨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고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아마 고국원왕 때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 국내성이 함락당하는 그 전쟁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를 보면 고자 가문은 좀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초기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가문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루묘지 : 중국 지린성 지안시 염모묘 소재

이런 고자 가문의 가문 의식과 관련해서는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모두루묘지'가 떠오른다. 그 내용을 보면 장수왕 때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사자(大使者) 모두루(牟頭婁)의 조상 역시 주몽왕을 따라 북부여(北夫餘)에서 내려왔고, 또 모용선비(慕容鮮卑)가 북부여를 쳐들어왔을 때 대형(大兄) 염모(?牟)가 큰 공훈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고자 가문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시조를 주몽왕과 연결시키고 있고, 모용선비와의 전쟁을 치룬 인물이 가문의 중시조 급으로 등장하고 있다. 즉 모두루 가문과 고자 가문은 모두 고구려 국가의 주요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개소문의 가문은 고자 가문과는 차이가 있다. 단지 증조 이래의 행적만을 밝히고 있을 뿐, 그 이전 가문의 내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문의 시조가 샘에서 나왔다는 독자적인 출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여러모로 보건대 연개소문 가문은 국내성 시기의 경험이 없는, 즉 평양천도 이후에 새로 등장하는 귀족가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리고 평원왕 이후 특히 영양왕 때 수와의 전쟁 과정에서 최상류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문 상승의 계기를 잡았던 듯하다.

이렇게 보면 연개소문 당시에는 2대에 걸쳐 막리지나 대대로를 역임하는 최상급 가문이었지만, 그런 가문의 지위를 갖게 된 지 불과 50년이 채 안 되는 신생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생 가문들은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유독 집착할 가능성이 높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데에는 혹 이런 가문의 욕망이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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