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두부 2모로 50인분 국 끓이더라

남정미 기자 2019. 11.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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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또다시 불거진 어린이집 부실 급식

닭 한 마리를 30명이 나눠 먹고, 두부 2모로 50인분 국을 끓인다. 고구마 1개는 20명의 간식이 된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나눠 먹었다는 성경 속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어린이집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이다.

일러스트= 안병현

또 발생한 어린이집 급식 비리

지난 11일 충북 청주시 청원구 A 어린이집 냉장고를 여니 오래된 음식 재료가 쏟아져 나왔다. 냉동실 속 빵은 유통기한이 열흘 넘게 지났고, 파와 당근은 오래돼 색까지 바랬다. 시커멓게 말라버린 키위를 본 한 학부모는 "깻잎인 줄 알았다"고 했다. A 어린이집 아이들은 그간 어린이집만 갔다 오면 "배고프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래도 부모들은 급식 비리가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 학부모에게 제공되는 식판 사진과 실제 받는 음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카레라이스가 나오는 날, 학부모에게 보낸 사진 속 식판은 카레 소스가 밥을 절반 이상 덮고 있었다. 카레 속 큼지막하게 썰린 고기와 감자, 당근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우리 아이가 이 음식을 먹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 아이들이 먹은 음식은 달랐다. 아이들 밥 위에는 과연 밥이 비벼질지 의문일 정도인 소량의 카레만 놓였다. 건더기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학부모들은 이 사진을 온라인에 올리면서 '남긴 게 아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꼭 먹다 남긴 식판 같았기 때문이다. 간식으로 호박죽을 준다고 해놓고선, 멀건 흰죽만 나온 경우도 있었다. 청주시 청원구청은 11일 학부모 민원에 따라 해당 어린이집을 조사했다. 그 결과 식단과 다른 음식을 제공하고, 부패한 음식 재료를 보관한 사실이 확인됐다. 청주시는 지난 13일 어린이집에 시정 명령을 내렸다. 청원구청 관계자는 "1개월 운영 정지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학부모들은 원장을 아동학대 혐의로 청주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A 어린이집 원장은 관계기관 등을 통해 "수사를 통해서 아니라는 걸 입증하고 싶다"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입장을 본지에 전했다.

1년 전 인천 미추홀구 B 어린이집에선 점심으로 김치 한 조각과 불고기 3점을 제공했다. 식판 사진이 공개되자 워낙 적은 양에 '조작 논란'까지 일었다. 구청 담당자가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결과, 실제 아이들이 배식받은 식판이 맞았다. 올해는 개선됐겠거니 하는데, 해마다 잊힐 만하면 어린이집 급식 문제가 불거진다. 이런 일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비단 A 어린이집, B 어린이집이 너무나 열악해서 벌어지는 특수한 일인 것일까.

온라인 커뮤니티 캡쳐

어린이집 교사 70% 이상 급식 비리 목격

시민단체인 '보육더하기 인권함께하기'가 지난해 10월 어린이집 교사 22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1.9%(164명)가 '음식 재료 구매 등 급식 비리가 의심되는 정황을 목격하거나 경험했다'고 답했다. 해당 단체가 공개한 제보 내용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장을 볼 때 원장 가정에서 먹을 음식 재료까지 어린이집 카드로 결제한다.' '짜장면이 간식인 날에는 짜파게티가 나온다.' '원장 제사 기간엔 문어가 (음식 재료로) 들어온다.'

경기도에서 12년째 어린이집 교사로 근무한 A씨는 "소고기 장조림을 준다고 했는데, 콩나물을 주는 식으로 반찬을 속이는 것은 어렵다"면서도 "장 본 재료를 (원장이) 가져가거나 남은 반찬을 가져가는 일은 비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쉽게 일어난다"고 했다.

어린이집은 정부와 지자체에서 보육료를 지원받는다. 대부분 어린이집에선 원장이 이 지원금에 맞게 음식 재료 등을 구매한다. 이를 보육정보시스템에 보고하지만, 실제 음식 재료가 어떻게 쓰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지자체가 관내 어린이집 급식 조리 현장을 점검할 때도 마찬가지다. 조리 현장의 위생이나 식중독 여부를 중점적으로 볼 뿐, 급식의 부실 여부는 살피기 어렵다. 복지부 관계자는 "현장 점검을 할 때 명절을 앞두고 음식 재료를 지나치게 많이 샀다거나, 술 등 어른들만 먹는 음식이 나오는 경우를 중점적으로 확인하고 있다"면서도 "급식 양이 적거나 재료가 부실한 것까지는 알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A씨는 "식단표에 계란말이를 한다고 써놓고, 구매 영수증에 계란이 있으면 큰 문제가 없다"며 "원장은 유기농 계란과 저렴한 계란을 한 판씩 산 다음, 유기농 계란은 원장이 가져가고 남은 계란으로 계란말이를 만든다"고 했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어린이집 교사 B씨는 짜장밥이 나오는 날 배식을 하려고 보니, 짜장이 건더기가 거의 없고 농도가 너무 묽어 '짜장국'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날 B씨는 아이들에게 미안해 자신도 거의 밥을 굶었다. B씨는 "잡채라고 해도 야채나 고기가 거의 없고, 깍두기라고 해도 절대 우리가 아는 깍두기가 아니다"라며 "그렇게 부실하게 만들고 남은 재료는 다 원장에게로 간다"고 했다.

내부 비리 고발 어려운 구조

이런 비리가 발생해도 어린이집 내부에서는 고발이 나오기 어렵다. 1차 피해자인 아이들은 나이가 0~5세에 불과하다. 자신이 겪은 상황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말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실제 급식 비리를 저지르는 어린이집에서도 나이에 따라 그 수위를 조절한다고 한다. 만 3세까지는 실제 식단과 다른 간식을 주더라도, 만 4세부터는 제대로 주는 식이다. 4세만 돼도 표현력이 훨씬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청주 어린이집은 교사가 제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이집 교사는 고용상 불이익을 두려워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인사권을 원장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경기도 오산의 한 어린이집에선 교사 C씨가 부실 급식을 외부에 알렸다가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당시 보육교사로 일한 지 1년 4개월 차였던 C씨는 고등어 반 마리로 15명이 나눠 먹는 모습 등을 보고 원장에게 개선을 건의했다. 나아질 기미가 없자 이를 학부모에게 알렸는데, 이 과정에서 C씨가 내부 고발자임이 밝혀졌다. C씨는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법률은 몰라도 아이들이 풍족하고 위생적인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교사로서 의무를 다해 이런 일이 생겼는데 왜 고소를 당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는 국민청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불기소 의견(혐의 없음)으로 검찰에 넘겼다.

서울에서 11년째 어린이집 교사로 근무하는 D씨는 지난 겨울 어린이집에서 김장했다. D씨는 "김장 체험이라고 하면서 아이들과 교사들까지 동원해 온종일 김치를 담갔다"며 "다음 날 그 많은 김치가 한 통도 없기에 다른 교사들에게 물어보니 원장 선생님 댁으로 간 것이었다"고 했다. D씨는 "외부에 이를 알릴까 고민도 했으나, 아예 이 업계를 떠날 각오를 해야 하더라"며 "이 어린이집을 그만둬도 워낙 원장 선생님들끼리 네트워크가 좋아 다른 곳 취업도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제까지 원장의 양심에만 맡기나

국공립이라고 해서 더 나을까. '보육더하기 인권함께하기'가 한 같은 조사에서 '국공립과 민간 어린이집 사이에 비리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139명(60.9%)이 차이가 없다고 답했다. 실제 지난해 강서구의 한 국공립 어린이집은 간식으로 배 1개를 3등분해 이를 10명이 나눠 먹게 하는 등 부실 급식으로 적발됐다.

우리나라 국공립은 스웨덴이나 프랑스처럼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형식이 아니라 80% 이상을 민간이나 법인 단체에 위탁하는 형식이다. 교사들을 채용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것은 여전히 원장의 몫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고 원장이 피고용인으로 순환 근무하는 어린이집 형태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은 학부모 운영위원회에 강력한 권한을 주고, 급식 시간 등에 학부모가 직접 참여하게 하는 '열린 어린이집'을 주장한다.

이윤선 배화여대 아동보육과 교수는 "인간의 두뇌는 0~6세 사이에 90% 이상 성장한다"고 했다. 배 교수는 "이 시기 아이들에게 부실한 급식을 주는 건 아이들의 성장과 뇌 발달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며 "매 끼니뿐 아니라 영양소를 고려한 간식도 꼭 챙겨줘야 한다"고 했다.

취재에 응한 보육교사들은 "정말 양심적으로 좋은 재료 써서 아이들에게 먹이고자 하는 원장 선생님도 많다"고 했다. 보육교사 D씨는 "그러나 모든 것이 원장 선생님 개인 양심에 달렸다는 그 자체가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강남구 하루 급·간식비 4345원 '금식판'… 용인은 1745원 '흙식판'지자체마다 추가 지원금 달라 논란

서울 시내 한 어린이집의 점심. 혼합곡에 다른 어린이집보다 반찬 가짓수도 한 가지 더 많다. 지자체 보조금을 더해 아동 1인당 급·간식비로 하루 2800원을 쓴다.

1745원으로 뭘 먹을 수 있을까. 어린이집에 다니는 0~2세 아이들은 이 돈으로 점심 한 끼와 간식 두 번을 먹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각 어린이집에 보육료 사용 지침을 내리면서, 0~2세 아동 1인당 급식비로는 1745원, 3~5세는 2000원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지침은 2009년 정해진 후 10년간 변하지 않았다.

이는 정부 급식 사업 중 가장 낮은 금액이기도 하다. 현재 국방부 군 장병 및 경찰청 의경은 2671원, 아동복지시설과 노인복지시설의 급식비는 2425원, 법무부 교정시설 소년원은 1803원이다.

이런 실정을 고려해 전국 234개 지방자치단체 중 상당수는 추가 지원금이나 현물 지원 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과 지방자치단체 규모에 따라 이 지원금이 달라 ‘흙식판’ ‘금식판’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회 정춘숙 의원이 복지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자체 추가 지원이 가장 많은 곳은 서울 강남구다. 직장 어린이집에 2600원을 지원한다. 이를 복지부 최저 기준에 더하면 하루 급·간식비가 4345원이 된다. 이어 경북 울진군(1650원), 전남 강진군(1268원), 충북 옥천군(1200원) 등의 순으로 지원금이 많았다.

반면 경기 용인, 경북 청도·고령군, 부산 서구 등 75개(32.1%) 지자체는 추가 지원금이 전혀 없었다. 2013년부터 영·유아 무상보육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사는 지역에 따라 급·간식의 질은 달라지는 것이다.

서울 마포구에서 만 2세 아이를 키우는 이모(33)씨는 “아이가 먹는 우유 200mL 한 팩이 800원인데 어떻게 2000원이 안 되는 돈으로 간식과 점심이 가능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해당 기준은 음식 재료 구입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어린이집은 공동구매 등을 하므로 일반 소매에서 사는 것과는 다르다”며 “내년에는 급·간식비 기준 지침을 0~2세는 1805원, 3~5세는 2559원으로 올리고자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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