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위기 사회'의 생생한 자전적 기록 [책과 삶]

홍진수 기자 입력 2019. 11. 22. 13:51 수정 2019. 11. 2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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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아빠의 아빠가 됐다
ㆍ조기현 지음
ㆍ이매진 | 208쪽 | 1만3000원

조기현씨(왼쪽)는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오른쪽)의 노동과 삶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제목 <1포 10㎏ 100개의 생애>는 미장일을 했던 아버지가 기술을 발휘할 때 쓰는 1포의 시멘트와 10㎏의 모래, 100개의 벽돌을 말한다. 조기현씨 제공

스무 살 때부터 치매 아버지를

간병하며 살아가는 흙수저 청년

영화감독·작가가 되고 싶었다

복지 지원의 경계선은 아슬아슬

가난을 서류로 증명하라는

사회 시스템의 벽에 부딪히며

꿈과 삶을 위해 악전고투하지만

그는 한국사회에 묻는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냐고

이 책은 묻는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간병하는 스무살짜리 ‘흙수저’ 청년은 미래를 꿈꿔도 되는가. 아니, 한국 사회는 이 청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가.

저자 조기현(27)은 아버지(58)와 단둘이 살았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했다. 조기현은 아버지에게 남았고, 여동생은 어머니를 따라갔다. “억압적으로 느껴지던 4인 가족에서 자율적인 2인이 됐다.” 조기현과 아버지는 별 애착 없이 지냈다. “간간이 밥을 같이 먹었고 자주 싸웠다.” 관계는 평등해졌다. 아버지는 자기 일을 했고, 조기현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난한 집이 으레 그렇듯 나눠줄 자원이 없으니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조기현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댄서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 영상도 춤도 글도 조금씩 건드리며 살았다. 대학 진학은 생각하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다닐 자신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고졸이나 중졸로 학력을 마친 감독, 댄서, 작가를 검색하며 안심했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학력이 필요 없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뭐라도 해보려고 하던 스무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노가다’를 하는 아버지는 양옥집 수리를 하다 쓰러져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심폐소생술을 한 뒤 119를 불렀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기기 위해서는 입원 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런데 중환자실 입원비가 만만치 않아 만 24세 이상의 ‘연대보증인’이 필요했다. 조기현은 당시 만으로 19살이었다. 얼마 안되는 친척들은 남보다 더 껄끄러운 관계였다. 조기현은 영화제작 수업을 함께 들은 수강생 중 30대를 찾아 연락을 했으나 긍정적인 답을 받지 못했다. 연대보증인 칸에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데리고 온 ‘김씨 아저씨’가 고민 끝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책은 2016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상시킨다. 영화에서 다니엘 블레이크가 영국 복지시스템의 온갖 부조리를 겪듯이 조기현도 번번이 벽에 부딪힌다. 아버지의 ‘무능’이, 조기현의 ‘가난’이 서류로 증명되지 않아 제도는 있으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 조기현은 지난 20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내 처지는 그게 아닌데, 아슬아슬한 경계 하나로 모든 것이 갈리는 것에 좌절감이나 절망감이 컸다”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이야기를 풀어내서 (지원을 받기 위해) 주민센터 문 앞에 서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35만원짜리 집에 살던 조기현은 결국 월세를 올려주는 대신 보증금 1000만원을 돌려받아 병원비를 낸다.

조기현씨의 가난을 따라다닌 온갖 진단서와 서류들. 이매진 제공

조기현은 병역의무도 져야 했다. 부사관 지원을 알아보고 면제 방법도 찾아보다가 ‘산업기능요원’이란 병역특례제도를 알게 된다. 산업현장에서 2년10개월을 일하면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다. 월급을 받을 수 있고,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으며 주말에는 집에도 다녀올 수 있다. 고등학교 때 기술학교에서 따둔 자격증이 도움이 됐다. 조기현은 아버지를 혼자 두고 충북 음성의 한 공장으로 들어간다. 주 6일을 일한 뒤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가 월요일 새벽에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한다. 조기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버지는 홀로 잘 지내지 못했다. “냉장고 뒤에서 누가 감시하고 있다”며 아들에게 자주 도와달라고 전화한다. 조기현은 공장에서 야근을 하다 ‘119’의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는 다시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조기현은 영화를 배우기 위해 모으던 적금을 깬다. 조기현은 책에 “주민센터에 들러서 상담을 받아보려 했지만, 내 수입이 180만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안된다고 했다. 질문 하나에 답하고 상담이 끝나버렸다. 마치 최대한 안되는 쪽으로 알아봐주는 공무원들 같았다”고 썼다.

아버지를 위해 벽에 붙여 둔 텔레비전 리모컨 사용설명서. 이매진 제공

병역을 마친 뒤에도 상황이 그리 나아지지는 않았다. 조기현은 꿈과 삶을 모두 놓치지 않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가끔은 “아빠를 정말 죽이고 싶다”고 위악을 부리지만,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망망대해 위 보트에서 주인공 파이를 위협하면서도 삶의 동력이 됐듯이, 조기현은 아버지를 보며 무기력과 외로움을 이겨낸다.

조기현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사람을 모아 정책에 반영될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를 간병하는 20대’는 그리 흔한 삶이 아니다. 간신히 찾아내 말을 붙여도 ‘사기꾼’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그래서 조기현은 자신의 ‘간병기’를 기록한 이번 책 앞뒤로 사회적 의제를 직접 이야기한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네 ○○은 네가 치워라’이다. 빈칸에는 노후, 죽음, 아픔, 간병, 돌봄, 부양, 수발, 간호 등이 모두 들어갈 수 있다. 조기현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한국은 ‘돌봄 위기 사회’라고 말한다. 에필로그 ‘아버지의 현재와 나의 미래’에서는 “돌봄을 논의하는 주체로 중장년층만을 내세우는 현실을 의심해야 한다. (…) 모든 세대가 돌봄을 이야기하고 고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조기현의 아버지는 현재 경기도 부천의 한 종합병원에 머물고 있다. 의료급여를 받아 병원비는 해결됐다. 아버지 앞으로 나온 생계급여 20만2320원에 조기현이 버는 돈 일부를 보태 병원생활에 필요한 생필품, 담배, 커피, 밑반찬 등을 산다.

조기현은 지금 스무살에 꿈꿨던 대로 영화를 만든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의 노동과 생애를 담은 영화 <1포 10㎏ 100개의 생애> 촬영을 마치고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6개월간 매달 70만원을 지원받아 영등포를 주제로 한 영상 작업도 진행 중이다. ‘서울시 청년수당’ 덕분에 책도 썼다. 조기현은 “건설일용직 일당이 10만원인데 한 달에 청년수당 50만원을 받으면 닷새를 쉴 수 있게 된다”며 “그 시간에 논문을 찾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복지 혜택도 늘어났고, 조기현은 당장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미래를 꿈꾸는 것은 ‘지속 가능한 일’일까. 조기현은 “저 혼자만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도 실험해볼 텐데, 아버지가 나오는 순간 제가 아무것도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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