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이'가 흥식 아빠 아니어야 했던 이유..'동백꽃' 임상춘의 필력[리뷰]

강경루 기자 입력 2019. 11. 22. 11:45 수정 2019. 11. 2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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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엔터테인먼트 제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이하 동백꽃)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작은 어촌 마을 옹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싱글맘 동백(공효진)과 열혈 청년 용식(강하늘)의 로맨스는 안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극은 시청률 기록을 계속 갈아치우더니 21일 최종회에서는 23.8%(닐슨코리아)라는 자체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이로써 동백꽃은 ‘SKY 캐슬’ ‘왜그래 풍상씨’ ‘열혈사제’에 이어 올해 평일 미니시리즈 중 시청률 20%대를 돌파한 작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면 이 담백하고 소소한 로맨스물이 이토록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동백꽃이 피었습니다
공효진 강하늘 등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배우들의 호연과 차영훈 PD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 등이 두루 흥행의 끌차가 됐지만, 최고는 역시 임상춘 작가의 극본이다. 젊은 작가진 중에서도 뛰어난 필력으로 주목받는 이 작가는 비단 로맨스에만 머물지 않았다. 로맨스 사이사이 연쇄살인범 ‘까불이’를 통한 서스펜스와 옹산이란 소공동체의 휴머니즘적 이야기를 진하게 풀어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기 쉬운 복합장르물인 셈인데, 동백꽃은 그러지 않았다. 임상춘은 로맨스와 휴머니즘, 스릴러 세 가지 서사 축을 긴밀하고도 유려하게 결합해내는 필력을 보여줬다. 이쯤 되니 “편견에 갇힌 맹수 동백을 깨우는, ‘촌므파탈’ 황용식이의 폭격형 로맨스”라는 틀에 박힌 극 소개가 이런 눈부신 반전을 위한 예비 작업이 아니었나 의심하게 될 정도다.

극에서 가장 돋보였던 건 까불이라는 존재였다. 늘 살해 현장에 “까불지 마”라는 쪽지를 남기는 연쇄살인범으로 옹산에 머물면서 숱한 사람들을 죽여 왔다. 살해의 대상이 된 대표적인 인물군 중 하나가 “직업여성”이었다. 까불이는 우리 사회 속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만연한 폭력적 구조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팬엔터테인먼트 제공

까불이는 서사적 장치이기도 했다. 순경인 용식이 까불이의 위협에 시달리는 동백을 “지켜주겠다”며 졸졸 따라다니게 되는 로맨스 장치이면서 추리의 재미를 줬다. 동백이 죽을 거라고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던 극이었는데, 동백이 죽지 않았으므로 이는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일종의 맥거핀이기도 했다. 소소한 마을 이야기로 채워진 극의 서사적 단조로움을 효과적으로 보완해주는 장치였다.

까불이가 ‘흥식’이어야 했던 이유
마지막 회에서 동백은 까불이에게 죽임을 당한 향미(손담비)의 맥주잔으로 까불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용식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동백은 자신을 향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만연한 폭력(까불이)을 극복한 여성이면서, 자신을 사랑하게 된 한 사람의 은유가 됐다.

사실 “출연자들에게도 극비에 부쳐졌던” 이 까불이의 정체는 최종회가 전파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흥식(이규성)의 아빠였다. 동백을 지키겠단 일념으로 용식이 쫓고, 파고들었던 이 까불이가 “공사장에서 추락 사고를 당했던” 흥식의 아빠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극의 모든 갈등 요소는 해소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계속해 눈에 밟히는 게 있었으니 이 드라마가 진득하게 풀어왔던 휴머니즘의 정수가 바로 부모와 자식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의 자식에 대한 끝없는 ‘내리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은 부모 자식 관계인 정숙(이정은)-동백, 동백-필구(김강훈), 덕순(고두심)-용식, 은실(전국향)-규태(오정세), 화자(황영희)-제시카(지이수) 등을 중심으로 인간과 사회의 올바른 모습을 탐구한다. 그건 부모의 자식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다. 가령 정숙(이정은)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동백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왔고, 극심한 가난에 동백을 고아원에 남겨둬야 했지만 “한순간도 동백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동백과 용식 등 모든 인물은 부모의 사랑을 통해 정체감을 더 탄탄히 다지고, 편견과 같은 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나간다. 사회의 은유인 작은 공동체 옹산도 이 가족 개념을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옹산의 주 상권인 게장 골목 사람들은 부모가 부재한 사이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위험에 처한 “가족과 다름없는” 동백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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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식의 아빠는 이 틀에서 빗겨선 존재였다. 흥식의 아빠는 흥식을 되레 옥죄인다. 흥식의 아빠는 “그만하라”는 아들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이고 다녔고, 결국엔 용식의 손에 잡혀 들어감으로써 흥식에게 “살인자의 아들”이란 편견을 씌운다. 흥식 아빠는 다른 부모들과는 달리 흥식의 삶을 더 지난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러나 흥식의 아빠는 역시 살인범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발을 신고 사람들을 죽이러 다니는 아들의 죄를 대신 덮어쓴 것이었다. 열등감에 파묻혀 무고한 이들을 죽이고 다닌 이는 흥식이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차치한다면 이 장면에서 흥식의 아빠는 “자식을 버린 죗값”의 생명 보험을 들고 죽음을 기다리는 정숙과 “아버지 얼굴 한 번 못 본 자식이 너무 측은해” 용식 앞에선 늘 을일 뿐인 덕순과 겹쳐진다. 흥식의 아빠가 대신 잡혀들어간 이유도 아들을 어릴 적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던 일종의 부채감 때문이었다.

드라마는 이로써 ‘까불이의 진짜 정체는 따로 있었다’는 반전과 함께 내리사랑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한다. 다만 극이 부모의 헌신 모두를 옳다고 말하진 않는다. 까불이의 아빠는 물론 늘 자영(염혜란)을 못살게 구는 규태의 엄마가 그렇다. 헌신에 가까운 사랑도 때때로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인물 군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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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끊임없이 긍정하는 극의 메시지는 이렇다. 까불이 같은 이들이 아무리 생겨나더라도 최종회 용식의 말처럼 “떼로 생겨나는” 선한 사람들의 힘으로 결국 모든 것은 옳고 바람직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 정신은 가족 내에서만큼은 역설적으로 분별이 사라지는 아카페적 사랑 덕분에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는 죽을 위기에 처한 정숙을 모든 옹산 사람들이 힘을 합쳐 구해낸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 모두의 작은 의지가 모일 때 가능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가족’이라는 존재는 모두의 마음속에 ‘필연적으로’ 이 “작은 영웅”을 심어 놓는다.

작가 임상춘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야기 전달자로 남고 싶어 필명 외에 어떤 것도 알리지 않는다는 작가는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며 행복해하는 걸 보고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 향미 역으로 열연한 손담비는 최근 드라마 종영을 기념해 만난 인터뷰 자리에서 “모든 배우가 대본을 보고 이 작품은 잘 될 수 밖에 없다고들 했다”며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감탄했다”고 전했다. 그는 글만으로 “시청자가 모두 기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냈다. 동백이 결국 꽃으로 피어났듯이, 임상춘 본인의 꿈도 동백꽃과 함께 활짝 꽃피운 셈이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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