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에 잇단 일가족 자살.. 손 내밀어야 주는 '복지'

남혜정 2019. 11. 22. 06: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생활고에 잇단 일가족 자살 왜 / 성북 네 모녀·양주 일가족 '비극' / 경제난에 관계의 빈곤 겹친 탓 / 부양의무 기준 막혀 지원 못받아 / '신청주의 복지' 한계 보완 필요 / 복지관 등 활용 고립계층 찾아야 / 인천 일가족 '가스 질식사' 추정
인천 한 임대아파트에서 일가족 등 4명이 한꺼번에 숨진 채 발견돼 주변을 안타깝게 하는 가운데 20일 오후 이들이 발견된 곳인 인천시 계양구 한 아파트 복도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성북구 네 모녀’에 이어 인천의 한 임대아파트에서도 일가족 등 4명이 숨진 채 발견되는 등 최근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가족이 모두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이 잇따르고 있다. 이달에만 세 번째, 올해 들어선 20건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지역사회와 고립돼 위기가 포착되기 힘들었고,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것으로 파악되면서 사회안전망을 더 촘촘히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손가정·생활고·복지 사각지대 공통점

21일 인천 계양경찰서 등에 따르면 지난 19일 인천시 계양구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A(49·여)씨와 A씨의 아들(24), 딸(20), 딸의 친구(19)는 국립과학수사원 부검 결과 가스 질식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되고 있다.

A씨는 몇년 전 남편과 이혼 후 자녀 둘을 데리고 생활했다. 실직한 후 지난해 10월부터 3개월간 긴급복지 지원금으로 매달 95만원을 지원받았지만, 이후에는 월 24만원 주거급여가 소득의 전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센터에서 불우이웃 구호품·후원금 등을 받기도 했지만 고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앞서 지난 2일에는 성북구 한 다세대주택에서 70대 어머니와 40대 세 딸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최근 2∼3개월간 100만원인 월세를 내지 않았고, 집 우편함에서는 채무이행 통지서, 이자 지연 명세서 등이 있었다.
경기 양주에서도 지난 6일 장흥면 부곡리 한 고가다리 아래에서 57세 B씨와 그의 6살, 4살 난 두 아들의 시신이 발견됐다. B씨가 생전 친척들에게 보낸 문자를 토대로 생활고로 인해 아들들을 동반한 채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일가족의 극단적 선택은 공통으로 한부모 가정에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으나 적절한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지원을 받다가 중단되는 등 복지 사각지대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천 A씨의 경우 관리비와 전기·가스·수도요금 체납이 없어 위기가구로 걸러지지 않았다. 긴급지원이 끝난 뒤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었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이 문제였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A씨가 생계급여를 받으려면 부양의무자가 경제능력이 없어야 하는데 A씨는 부양의무자인 이혼한 전남편과 친정부모 재산을 조사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며 좀 더 두고 보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관악구 탈북 모자 아사 사건에서도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러 간 이들에게 남편과의 이혼확인서를 요구해 결국 도움을 받지 못했다.

성북 네 모녀는 숨진 지 최대 한 달가량 지난 뒤 발견됐다. 일부 공과금 체납이 있었지만 기간은 위기가구 기준 6개월에 못 미치는 3개월이었고, 체납액이 1000만원이 넘어 복지 지원 모니터링 대상에서 빠졌다. 긴급복지 지원도 신청하지 않았다. 주민센터를 찾은 이들에게 담당자가 생활고 등에 대한 상담을 제안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신청하지 않는 한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지난 2일 다세대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성북구 네 모녀’의 장례를 위해 시민단체 등이 모여 꾸린 ‘성북네모녀 추모위원회’ 관계자들이 21일 서울 성북구 삼선교 분수마루에서 시민분향소를 차린 뒤 기자회견을 열고 복지체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정부·지역사회 함께 안전망 마련해야”

전문가 및 관련 단체는 극단적 선택을 막기 위해 정부와 지역사회가 함께 협력해 경제적 위기에 처한 가정의 고립을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경제적 어려움과 관계의 빈곤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라며 “우리나라 복지제도는 신청주의인데, 공과금 체납 등 여러 지표에서 위험도가 높은 가정뿐만 아니라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고립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범중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빈곤계층 발굴을 위해 공과금 미납부자 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명확히 한계가 있다”며 “지역사회에서 차상위 계층이나 빈곤계층 목록을 갖고 있는데, 지금 공무원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복지관, 종합복지관 등 다양한 단체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중, 삼중으로 확인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북구 네 모녀’를 애도하기 위해 이날 서울 성북구에 시민 분향소를 마련한 ‘성북 네 모녀 추모위원회’는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 정책에도 빈곤층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며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고, 불안정한 영세 자영업자와 노동자의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혜정·이강진 기자 hjnam@segye.com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