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조선시대 빤스가 어딨냐" 신상옥 말에 치마만 두른채 촬영

박정호 2019. 11. 2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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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32)
<3> 내 영화의 뮤즈 최은희
최은희 "난 다 봤다" 두고두고 놀려
신 감독 북한서 네 차례 탈출 시도
수용소 갇혀 단식하다 간염 얻어
영화 ‘강화도령’(1963)에서 복녀(최은희)가 원범(신영균)에게 찢어진 바지를 꿰매줄 테니 벗어달라며 자신의 치마를 빌려주고 있다. [영화 캡처]
‘분단의 여배우’라 불리는 최은희씨와 나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함께 누빈 환상의 콤비다. 연인으로, 부부로 호흡을 맞추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다. 지난해 봄 최씨가 세상을 떴을 때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괴로웠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함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말년에 몸이 아파 고생하다 돌아간 게 참 마음 아프다.

“세월이 갈수록 더 보고 싶어요.” 최씨는 2006년 4월 남편 신상옥 감독을 먼저 떠나보내고 종종 이런 말을 했다. 1978년 1월 최씨가 홍콩에서 북한에 납치되자 신 감독은 2년 전 이혼한 전처를 찾겠다며 홍콩에 갔다가 그해 7월 똑같이 납북됐다. 최씨는 신 감독이 북한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병을 얻은 것 같다고 한탄하곤 했다. 술·담배도 안 하던 이가 북한을 다녀온 뒤 건강이 악화됐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네 번이나 탈출하려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 같은 곳에 끌려갔어요. 거기서 단식을 하니까 강제로 영양제 주사를 맞았는데 그게 소독이 제대로 안 돼서 C형 간염균을 얻은 거예요. 숨지기 2년 전엔 간 이식 수술도 받았어요.”


최은희 북 배우들 한복 지어 입혀

신 감독이 타계한 후 최씨도 점점 쇠약해졌다. 2010년부터 척추협착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졌고, 말년에는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도 받았다. 그래도 바깥 활동을 할 때는 여배우의 품위를 지키겠다며 한껏 치장을 하고 씩씩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최은희씨와 종종 식사자리를 마련해 정담을 나눴다.

최씨를 처음 만난 건 신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다. 김진규·최은희씨가 주연이고 나는 조연으로 그녀의 오빠 역을 맡았다. 신 감독은 이때 갓 데뷔한 나를 눈여겨본 모양이다. 우리 셋은 ‘상록수’(1961), ‘연산군’(1961), ‘열녀문’(1962), ‘강화도령’(1963), ‘빨간 마후라’(1964), ‘이조 여인 잔혹사’(1967) 등에서 손발을 맞췄다. 다른 감독 연출작까지 포함해 최씨와 나는 30여 편을 함께했다.

300편 넘는 영화를 찍었지만 내 신체의 은밀한 부위까지 목격한 여배우는 최씨가 유일하다. ‘강화도령’ 촬영 때니 50년도 더 된 일이다. 나는 왕손인 줄도 모르고 강화도 갯벌에서 뛰놀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철종으로 등극한 촌뜨기 ‘원범’, 최씨는 원범의 단짝 친구 같은 말괄량이 섬처녀 ‘복녀’로 나왔다. 원범이 산에서 칡뿌리를 뽑으려다 굴러 한 벌뿐인 옷이 찢어지자 복녀를 찾아가 꿰매 달라고 부탁한다. 복녀가 벗어준 한복치마를 입고 기다리는 장면을 찍는데 신상옥 감독이 이런 주문을 했다.

“신영균씨, 이거 찍을 땐 ‘빤스’까지 다 벗어야 해.”

“예? 농담이지요?”

“아이 벗으라니까. 조선시대에 ‘빤스’가 어딨느냐 말이야.”

신영균이 나무 뒤에 숨어 최은희의 치마를 두르고 바지를 벗어 던져준 후 드러난 속살을 감추고 있는 모습. [영화 캡처]
조선 말기에는 속옷이라고 해봐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흰 천이었다. 나는 결국 흰 천만 걸쳐 입고 치마를 둘렀다. 한창 촬영하다 강둑에 앉아 쉴 때였나 보다. 아래쪽에 있던 최씨가 나한테 손가락질하며 웃기 시작했다.

“최은희씨, 갑자기 왜 그래?”

“아유 난 몰라, 다리 쩍 벌리고 편히 앉으니 속이 다 들여다보이잖아요.”

최씨는 이후 두고두고 나를 놀려댔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그때 다 봤다”며 깔깔 웃곤 했다. 마침 영화 속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원로 배우 신영균(91)씨가 지난달 7일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에서 영화 '강화도령' 스틸컷을 보며 촬영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김경희 기자

최씨는 상대 배우를 참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영화계 선배였지만 나는 “최은희씨” 혹은 “최 여사”라고 불렀다. 영화밖에 모르는 남편, 신 감독 때문인지 최씨는 손재주가 좋고 생활력도 강했다. 밤 늦게까지 촬영이 이어질 때도 대기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신 감독은 젊어서 못질 한 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가정을 등한시했다).

“최 여사, 가만히 쉬지 않고 뭘 그렇게 계속해요?”

“바느질이든 뜨개질이든 뭘 해야 시간이 잘 가요.”


탈북 후 미국 머물 때 찾아가 만나

신영균과 최은희는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다. [중앙포토]
나중에 최씨에게 들은 얘기지만 78년 신 감독과 함께 납북돼 북한 영화를 제작할 땐 배우들의 한복을 직접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 옷은 우리 전통 한복에 비해 볼품이 없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 ‘사랑 사랑 내 사랑’ 등 영화 17편을 찍었다. 최씨는 북한 영화 ‘소금’으로 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수상했다.

두 사람은 86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대사관을 통해 탈북에 성공했지만 간첩이 두려워 바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신 감독 부부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 부부가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북한에서 영화 만들 때 신영균이 생각 많이 났어.”

“그렇다고 날 불렀으면 큰일났겠네. 나도 납치당할 뻔했구먼.”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냉면도 먹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하늘나라로 간 최씨가 신 감독을 잘 만났는지 모르겠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먼저 가서 ‘신필름’ 같은 영화사를 만들고 있으라고, 같이 출연하자고 당부해 두었는데….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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