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의 도전' 출간한 김도현씨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것, 우리 사회 공고한 혐오의 벽이죠"

배문규 기자 2019. 11. 1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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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사회·문화적 차별에 쓴소리

“200년 전에는 장애인이 없었다.”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도현씨(45)가 최근 펴낸 <장애학의 도전>에 나오는 얘기다. 조선시대 ‘심청전’에도 심 봉사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장애는 단순히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적 산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지난 11일 만난 김도현씨는 “문제는 드러나고 시끄러워져야 해결되는데 장애는 일상에서 배제되고 토론조차 못되는 현실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장애인이라 차별받는 게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죠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장애학의 핵심 명제다.

김씨는 책에서 영화 <노예 12년> 이야기를 꺼낸다. 자유민이었던 주인공이 노예가 돼 고초를 겪다가 다시 자유민으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피부색은 그대로다. 흑인은 피부색이 아니라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이다.

여전히 갸웃하는 사람들을 위해 영국인이 한국인에게 말을 거는 상황을 가정해본다. 영어로 대답을 못하면 당황스럽겠지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국인 자리에 농인을 놓으면 어떨까. 역시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없지만, 이 경우엔 농인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보자. 한국인이 영어를 배웠다면 영국인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통역의 힘을 빌릴 수 있다. 농인도 청인(聽人)이 수어를 배웠다면 능숙한 의사소통이 될 수 있고, 수어통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결국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상황에 따라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이 나뉜다. 그런데 왜 장애인에 대해선 ‘할 수 없음’을 만드는 사회적 조건 대신에 ‘몸의 손상’만을 문제 삼는 것일까.

장애학 연구자인 김도현 노들장애야학 교사 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는 지난 11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할 때 ‘정상인’ ‘일반인’으로 부르는 실수는 피했으면 한다”며 “그 말속에 장애인은 ‘예외적이고 비정상’이라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장애인’이 그나마 적절한 표현이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배려 대상으로만 여겨 가장 답답

시스템 바꿔 해결할 문제로 봐야

“장애는 몸의 차이일 뿐인데 ‘할 수 없어요’. 사회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되고 운영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휠체어 타는 장애인은 시내버스에 탑승할 수 없지만, 바닥이 낮고 경사판이 설치된 저상버스는 탈 수 있잖아요. 몸은 그대로인데 어떤 때는 탈 수 있고 어떤 때는 탈 수 없다면, 몸이 문제일까요 버스가 문제일까요. 장애인이 ‘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합니다. 단순히 사람 간의 차별이 아니라 제도적·문화적·구조적 차별입니다. 장애학이 도전하는 지점입니다.”

책에선 장애를 열등함으로 만드는 ‘우생학’ 논리와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에 나오는 생명에 대한 위계적 관점 등 논쟁적 화두를 엮는다. 그러면서 “인간중심주의, 즉 휴머니즘이야말로 비장애인 중심 세계를 강화하고, 장애 해방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세계관”이라고 주장한다. 휴머니즘에선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규정하는데, 반대로 ‘이성적이지 않은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상성에 미달하는 인간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쓸모없는 노동력’이다. 암묵적 차별의 근거다. “장애 해방으로 나아가다 보면 결국 ‘탈시설’과 ‘노동’이 문제될 것 같아요. 노동할 수 없는 불인정노동자를 시설에 수용하면서 장애라는 범주가 형성됐거든요.”

김씨는 노동의 정의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다. “상품 가치 대신에 ‘사회에 대한 기여’로 노동을 측정해야 합니다. 지식노동이나 가사노동도 직접적 이윤을 만들어내진 않지만, 중요한 노동 행위잖아요. 공동체에서 장애인 노동도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노동의 틀이 바뀌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정의이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장애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두 사건이 있었다. 1842일 농성 끝에 지난 7월 폐지 결정이 나온 장애등급제와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논란이다. 현장에서 20년간 활동한 김씨는 “사회가 장애 문제를, 시스템을 바꿔 해결할 문제라기보다는 배려 대상으로만 보는 데서 가장 답답함을 느낀다”고 했다. 함께 고민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다들 ‘잘 알겠다’ ‘안됐으니 도와주겠다’고 해요. 전혀, 1도 몰라요. 더 공고한 혐오의 벽입니다. 차별 문제도 우리가 바꿔야 할 건 특정 개인들이 아니라 구조인데, 무엇이 잘못됐는지 들으려고 안 해요. 그러니 예산 얘기만 하고, 근본적 문제는 바뀌지 않는 거죠.”

장애에 대한 ‘좋은 말’에도 짚어볼 지점은 있다.

‘장애인에게 좋은 것은 비장애인에게도 좋다’ ‘당신도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같은 표현이다. “타당한 얘기들이지만, 장애를 모두의 문제로 확장하는 데는 충분치 않습니다. 이를테면 ‘여성에게 좋은 것이 남성에게 좋다’ ‘당신들도 살다 보면 흑인이 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나한테도 좋다는 ‘이익’의 관점은 표피적인 접근이죠.”

‘자립’ ‘의존’ 이분법도 벗어나야

‘함께 어울려 서도록’ 인식 전환을

인식의 전환을 위해선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장애인도 ‘정상적’ ‘자립적’ 존재라고 항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人間)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의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이다.

그는 “장애인에게 유독 강요되는 홀로서기와 낙인화된 의존을 넘어 ‘함께 어울려 서는’ 연립(聯立)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선의만으로는 안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껄끄러워하면서도 정작 알려고는 않잖아요. ‘잘해주겠다는데 왜 까칠하게 나와’가 아니라 공부하고, 다가가야죠.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선 비장애인들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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