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김장 스트레스" 52%.. 요즘 시댁·처가 흔드는 '김장 신경전'

김미리 기자 조유진 기자 2019. 11.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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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장이란 무엇인가 2538명의 대답
아내는 꼭 이렇게 담가야하나 불평..
어머니는 이게 다 정성, 남편들만 곤혹
친정엄마가 준 김장김치 절반은 버리기도
5060들은 김장 포기 못하고 "우린 낀 세대"
문화체험으로 배우고 싶다는 젊은 층도
일러스트= 안병현

"아내는 꼭 해야 하느냐고 불평, 어머니는 이게 다 정성이라고 합니다. 가운데 껴서 곤란해요." "우리 대(代)에서 끝내려고요. 자식들은 안 할 것 같고." "요즘 세상에 꼭 해야 하나요? 돈 낭비, 시간 낭비." "좋은 전통인데 누군가는 이어야죠."

명절 제사를 두고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아니다. 김장철 맞아 벌이는 신경전이다. 2020년 먹을 김치 준비가 한창인 요즘, 가족의 '김치 공동체'를 잇겠다는 정통파와 편리함을 택하겠다는 '김포족(김장 포기족)'이 공존한다. 김장을 둘러싼 세대별 속마음을 들어봤다. '아무튼, 주말'이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조사한 '김장 설문'(성인 남녀 2538명 대상)도 곁들였다.

김치는 가족이다

설문 응답자 34%가 '올해 김장을 직접 한다', 28%가 '시댁(본가)이나 친정(처가)에서 한다'고 답했다. '안 한다'는 38%였다. 여전히 62%의 삶엔 찬바람 솔솔 부는 요맘때 주요 이슈가 김장이다.

서울에 사는 워킹맘 이주은(가명·45)씨는 2주 앞으로 다가온 시댁 김장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결혼하고 17년째 지방에 있는 시댁으로 김장하러 내려간다. 이씨는 "명절 스트레스를 한 번 더 받는 느낌"이라며 "하루 내내 김치 담그다 내가 파김치가 된다"고 했다. "어머니 면전에서 싫은 내색 할 수 없어 가져오는데 입맛에 안 맞아요. 주변에 나눠주고, 처치 곤란해 버리기도 하고….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느낌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김치는 곧 가족이다. 끈끈한 유대가 돌연 스트레스 유발자가 되기도 한다. 응답자 52%가 '김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기혼 응답자(1531명) 27%는 '김장 문제로 시댁(본가)이나 친정(처가)과 갈등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다. 특히 20대 기혼자는 44%가 '그렇다'고 답해 아래 세대로 갈수록 김장을 둘러싸고 세대 차를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푹푹 쉰 김치처럼 묵은 불만이 폭발하기도 한다. "어머니, 올해부턴 김장하지 마시죠." 이동수(가명·45)씨는 얼마 전 '김치 독립'을 선언했다. 해마다 본가에서 이씨 사형제 내외와 아이들까지 온 식구가 모여 김치 50포기를 담갔다. 김장을 하지 말자고 한 표면적인 이유는 어머니의 체력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본가, 처가에서 김치를 싸주니 냉장고가 폭발 직전이에요. 맞벌이라 외식이 많다 보니 도저히 다 소화할 수가 없어요. 낭비다 싶었어요. 얘기해보니 다른 형제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어머니는 아들의 폭탄 선언에 수긍하면서도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의 빨간 탯줄

부산에 사는 주부 김정신(68)씨는 매년 서울 사는 딸과 아들네 집으로 김장 김치를 보낸다. "내 품을 떠난 자식과의 끈 같아요. 한국 엄마들에겐 어미와 자식을 잇는 빨간 탯줄 같기도 하고요. 내 몸의 영양을 탯줄로 줬듯 김치에 자식 사랑을 담아 보내는 거죠." 김씨는 "아이들한테 부담 주긴 싫어 이웃들하고 모여 한다"며 "체력이 점점 떨어져 해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다"고 했다.

"엄마가 김치 담그는 모습을 생각하니 벌건 김칫국물이 엄마 피 같은 거예요. 마음이 아파서 이제 그만하시라고 말을 툭 뱉었는데 엄마한텐 상처가 된 모양이에요." 지방에 있는 친정에서 매년 김치를 받는다는 김민정(43)씨가 말했다. 그는 "절반도 못 먹은 작년 김장 김치를 보면 맘이 착잡해진다"며 "현실적으론 사먹는 게 맞는데 엄마 정성을 뿌리칠 수도 없다"고 했다.

김치는 내리사랑이다. 이남길(가명·57)·박옥희(가명·52)씨 부부는 성인이 된 미혼 딸 셋에겐 김장할 때 손도 못 대게 한다. "김장 같은 집안일 시키고 싶지 않아요. 예쁘고 아까워서 못 시키는 거지. 자기들 살기도 바쁜데 뭘…." 남편 이씨는 "요즘 시어머니들은 세상 뜰 때까지 며느리 눈치 보면서 김장해줄 텐데 뭐 하러 김장을 배우냐"며 웃었다. 아내 박씨는 "자기 입맛대로 인터넷에서 레시피 찾아 김치 담글 수 있는 시대니 딸들에게 굳이 가르칠 필요가 있나 싶다"고 했다.

5060은 '김치 낀 세대'다. 김치 잘 안 먹는 자식을 기르지만, 김장의 무게를 내려놓지는 못한다. 주부 권정원(56)씨는 올해를 '김장 분가(分家)' 원년으로 삼았다. 작년까지 친정에 모여 형제들이 함께 김장을 했지만 올해는 친정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직접 담그기로 했다. "사먹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장녀로서 집안의 맛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어요. 장남이 제사 물려받듯 장녀가 엄마의 김장을 이어받았네요(웃음)." 여동생 둘과 조카가 권씨 집에 모인다. 두 아들도 같이 담글 예정이다. 권씨는 "자식 세대에선 생활 방식이 달라져 김장하는 집이 거의 없지 않겠느냐"며 "이런 책임감을 느끼는 게 우리 세대가 마지막 아닐까 싶다"고 했다.

김치는 안 먹어도 김장은 문화 체험

김치가 밥상에서 점점 뒤로 밀리는 건 현실이다. 절반 이상(57%)이 '김치를 매일 먹는다'고 했지만, 아예 안 먹는다는 사람(8%)도 있었다. 20대 응답자 14%는 아예 안 먹는다고 했다. '김장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64%, '필요 없다'는 사람이 36%였다. '김치 없이 살 수 있다'는 답이 20대는 29%, 60대는 20%였다.

황유진(24)씨는 "매운 음식을 못 먹어 김치를 입에도 안 댄다"며 "외할머니는 한국인이 사스 안 걸린 것도 김치 덕분이라면서 걱정하시지만 체질상 맞지가 않는다"고 했다. 김정식(55)씨는 "예전부터 김치를 즐기지 않아 '한국 사람이 김치를 안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며 "요즘엔 김치 안 먹는 사람이 많아 이상하게 안 봐서 좋다"고 했다.

김치 수요가 줄자 김치 냉장고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세대 간 인식 차가 크다. '김치 냉장고를 필수 가전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40대 69%, 50대 83%, 60대 이상 84%가 필수라고 답한 반면, 20대(55%)와 30대(51%)는 절반 정도만 필수품으로 생각했다.

김치 냉장고의 주춤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가전업체들에선 다른 식재료를 위한 맞춤 기능을 김치 냉장고에 넣고 있다. 삼성전자는 온도를 뿌리채소와 열대 과일에 적합한 10~15도로 유지해주는 '감자·바나나 모드', 위니아딤채는 빙결점(영하 1.7도)과 0도 사이에서 육류를 숙성할 수 있는 '빙온숙성모드'와 다진 야채를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이유식·샐러드 재료 보관 모드'를 김치 냉장고에 추가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김치 냉장고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라며 "'김치 냉장고=사계절 식재료 저장고'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줄어든 김치 소비량에 맞춘 미니 김치냉장고도 인기다. 위니아딤채는 "9~10월 100L급 미니 제품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571% 증가했다"며 "김치를 적게 먹는 가족이나 1인 가구에서 많이 찾는다"고 했다.

젊은 세대가 모두 김장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김치를 즐기지는 않지만 문화 체험, 교육 차원에서 김장을 배우거나 가르치고 싶다는 부류도 있다. 워킹맘 이정은(가명·31)씨는 친정표 김치, 시댁표 김치를 모두 거부했다. "한 달에 서너 번밖에 김치를 안 먹어 양가에 김장 김치가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냉장고에 안 먹는 음식이 쌓여 있는 게 싫기도 하고요." 이씨는 "친정 엄마가 외할머니댁에서 김장을 해서 김장 담그는 걸 본 적이 없고, 시어머니도 며느리한테 말하기 어려워서인지 같이 하자는 말씀을 안 한다"며 "김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전통문화를 체험한다는 차원에서 김장을 해볼 생각은 있다"고 했다. 주부 김수영(43)씨는 "친정 엄마가 김장을 해주는데 아이 교육용으로 김장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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