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천리장성은 없다(2)

임기환 2019. 11. 1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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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83] 요동의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다 보면 중국의 거대한 통일 제국인 수·당과 생존을 건 치열한 전쟁을 눈앞에 두고 고구려인들이 가졌을 긴장감을 상상해 보게 된다. 아니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산성 현장에 올라서면 자신감 넘치는 고구려인의 기개도 느끼게 되지만 때로는 그들이 느꼈을 전쟁에 대한 두려움 또한 절로 짐작하게 된다.

중국 요녕성 와방점시에 있는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을 답사할 때였다. 이 산성은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산 중턱에서 정상을 둘러 자리 잡고 있다. 서문을 방어하는 옹성은 많이 무너져 내렸지만 완곡한 반원을 그리는 옹성의 선은 멋졌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 옹성과 서쪽 성벽이 2차로 축성한 성벽임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1차 축성 시 서문에는 옹성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다시 성벽을 두껍게 외벽을 덧쌓아 보강하고 성문 앞에는 둥근 옹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득리사산성의 서쪽 성벽 : 성벽 가운데를 보면 2차 축성 흔적이 완연하다.

이렇게 공들여 2차 축성한 때는 언제였을까? 발굴조사도 아니고 그냥 답사객이 그 시점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고구려가 수 또는 당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는 걸. 그리고 기존 성벽을 이중 삼중으로 보강하는 이런 추가 공사는 눈앞에 닥친 거대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걸.

아마 그 전쟁이 수양제의 침공은 아니었을 게다. 이때만 해도 고구려가 전체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전면적인 대비를 하고 있었던 흔적은 잘 안 보인다. 그렇다면 당태종의 침공이 예상되고 있던 어느 시점이 아니었을까. 근거 없는 추정이지만, 현장에서 받은 느낌으로는 정답에 가까우리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득리사산성에서 복주하 건너편을 바라보면 남마권자산성(南馬圈子山城)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성의 거리는 불과 3.4㎞다. 남마권자산성은 득리사산성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낮은 구릉을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평지에서 접근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산성 규모도 득리사산성과 별 차이가 없다. 내부 주거 공간은 훨씬 넉넉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까이에 규모가 비슷한 또 다른 산성을 축조하였을까? 이 두 군데 산성 모두에 같은 급의 지방관이 파견되어 서로 다른 영역을 다스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비록 하천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두 성이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상시에는 지방관 등이 거주하기에 편한 남마권자산성이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던 치소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남마권자산성에서 위상이 높은 건축물에만 사용되었을 기와가 다수 출토된 점이 이를 시사한다. 이미 남마권자산성이 있는데, 왜 가까이에 득리사산성을 다시 구축하였을까?

이는 득리사산성이 산 정상의 포곡식 산성으로 방어력에 있어서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생각하면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적의 침공에 대비하여 새로 구축한 군사적 목적의 산성이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즉 평상시에는 남마권자산성을 치소성으로 이용하다가 전쟁 시에는 득리사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성을 쌓은 시점은 언제일까? 수 혹은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전에 축성되어 있었다면 앞서 언급한 대로 최소한 2차 축성은 당과의 전쟁을 앞두고 이루어졌음은 틀림없으리라.

다른 사례를 보자. 요동반도 남단 대련에서 압록강 하구의 단동을 잇는 도로의 중간쯤에 있는 장하(庄河)시 가까이에 성산산성(城山山城)이 있다. 성산산성은 단정하게 축조된 성벽이 제법 잘 남아 있고 여러 독특한 구조물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고구려 산성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로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필자도 이곳을 여러 차례 답사하였는데, 산성 정상에 오르면 협하(夾河)가 흐르는 깊숙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산 능선에 또 다른 고구려 성벽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후성산산성(後城山山城)이다. 이 두 성의 거리는 겨우 1.5㎞에 불과하다.

몇 번을 벼르다가 마침내 후성산산성을 답사하게 되었다. 성산산성에 비하면 후성산산성은 매우 거칠게 축조하였으며, 일부 성벽은 축성 구간이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급하게 쌓은 흔적이 역력하다. 게다가 성산산성은 입지상 산상형 포곡식 산성이지만, 성 안에 평탄한 곳이 적지 않고, 완만한 경사면에는 계단식으로 대지를 만들어서 제법 많은 주민들이 들어와 살 수 있을 만큼 주거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산성이다.

후성산산성의 성벽 : 거칠게 쌓은 성벽과 축성 구간이 드러난 모습.

이와 달리 후성산산성은 지세가 험준하며 주민들의 입거보다는 방어력 강화에 목적을 둔 산성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득리사산성과 남마권자산성의 관계와 유사했으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성산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가까이 후성산산성을 다시 쌓은 게 아닌가 싶다. 거칠고 급하게 쌓은 성벽 위를 걸으면서 곧 닥쳐올 당과의 전쟁을 앞두고 후성산산성을 새로 쌓는 고구려인들이 가졌을 긴장감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례를 보겠다. 동요하에 요원시가 있는데 이곳에는 고구려 산성 3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 중심은 지금 요원 시내에 위치하여 시민공원으로 개발된 용수산성(龍首山城)이다. 그리고 용수산성에서 동북쪽으로 1.5㎞ 거리에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이, 동남쪽으로 2㎞ 정도 거리에 공농산성(工農山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3개 성 사이의 거리나 입지 등을 보면 지방행정의 중심지는 용수산성이고, 나머지 2개 성자산산성이나 공농산성은 교통로를 방어하는 군사적 목적이 두드러진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2곳의 산성 역시 전쟁에 대비할 목적으로 용수산성보다 나중에 축성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요원시 일대를 이른바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작점인 부여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요원시 용수산성, 공농산성, 성자산산성의 분포도./ 여호규, `高句麗 城Ⅱ`(1999, 국방군사연구소)에서 인용함.

사실 현재 요동 지역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크고 작은 고구려 산성은 언제 축조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우리로서는 지금 중국 땅에 있는 고구려 산성에 대해 지표조사는커녕 단순한 탐방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중국 측에서 전면적인 조사를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광개토왕, 장수왕 때 요동을 장악하면서 산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수·당과 전쟁을 하기 이전에는 요동 곳곳에 자리 잡은 산성들 대부분이 축성되었으리라 짐작해왔을 뿐이다.

왜냐하면 고구려 산성은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행정적인 치소가 있는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동을 영역화한 뒤에 체계적인 지방통치를 위해 각 거점에 산성을 축조하였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3곳의 사례처럼 군사적 목적이 두드러진 성곽들이 기존의 성곽 인근에 축성되어 있는 모습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기존 산성에도 추가로 방어용 성곽 등이 보강 또는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높은 사례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군사적 목적의 소규모 보루성들이 곳곳에 밀도 높게 구축되었음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문헌에는 요하선에서 봉수대 설치 흔적도 보인다. 645년 당태종의 침공 시에 선발대로 나선 이세적이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너 현토성을 공격할 때에 요하에서 현토성 사이의 봉수대를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 등 이런저런 상황들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거대한 전쟁을 앞두고 특정 시기에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 국경지대에서 전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이렇게 당과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성곽들에서 전개된 축성 등 방어시설의 구축과 정비 과정을 천리장성의 축조로 보고자 한다.

요하에서 천산산맥 산자락 끝에 자리 잡은 거점성들은 대략 30~40㎞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여러 소형 산성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부여성으로 볼 수 있는 요원 일대에서 요동반도 끝인 대흑산산성까지 연이어 점점이 이어져 있는 이들 성곽과 방어시설을 당군은 천리장성으로 파악했던 듯하다.

오늘 우리 머릿속에서 그리는 높은 방벽으로 구축되어 한 줄기로 이어져 있는 장성은 중국 명나라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중국 고대의 장성이 반드시 인공구조물인 성벽이 연속되는 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소와 봉화 등 군사시설이 점점이 연결되는 방어선도 장성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담장이 설치되었다고 하더라도 꼭 인공구조물만이 아니라 험한 산세 등 최대한 자연물을 이용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 천리장성도 아마 점점이 산성이 이어지는 그런 형태를 상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구려 천리장성을 둘러싼 논의와 그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그 실체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고구려 천리장성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고구려인들의 굳은 의지를 담은 실체적 구현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그 장성은 고구려를 지키는 굳센 방벽이 되었을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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