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낙연 총리 말의 의미는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가 일본에서 1977년에 펴낸 '공기의 연구(空氣の硏究)'는 일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일본인론으로 꼽힌다.
한국은 공기라는 단어가 주로 1차적인 의미로 우리가 숨쉬는 대기 하층부 기체 복합물을 뜻하지만, 일본에선 우리가 쓰는 2차적인 의미 즉, 분위기라는 뜻으로 더 명확하게 활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말하는 공기는 사회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더 가깝다. 시치헤이는 공기를 '심리적 질서'라고도, '일본이 다른 어떤 집단보다 더 정교하고 순조롭게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발명해낸 허구 또는 신화'라고도 했다. 공기는 어쩌면 한목소리를 내는 일본적 세계라고 볼 수 있다.
방일 이틀째 이낙연 "공기가 달라졌다"
경색된 한일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22일부터 일본에 온 이낙연 국무총리는 "공기가 달라졌다"는 말을 몇차례 거듭했다. 도쿄 특파원(1989~1993년) 경험을 토대로 일본을 비교적 잘 이해하는 지일파 한국 총리인 그는 변화한 일본 사회 분위기를 '달라진 공기'로 압축해 설명한 셈이다.
변화는 다행스럽게도 한국에 긍정적이다.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를 정점으로 그동안 일사분란하게 반한 감정을 노출해왔다. 지난 7월 서청원 의원(무소속) 단장으로 의원외교단이 일본을 찾았을 때 현지에서 한국 의원들을 철저히 무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공기'다. 당시 일본 여당인 자민당 2인자 니카이 도시히로( 二階俊博) 간사장은 30분을 남기고 약속을 취소했다.
넉 달전 이야기이지만 이 시간은 산술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일본에선 그 사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일본 표현대로 '천황(天皇·덴노)'으로 불리는 왕이 바뀐 것이다. 입헌 군주제인 일본에서 왕은 정치에 관한 실무적 힘은 없지만 그래도 사회를 구성하는 '공기'의 정점이다.
새 일왕이 내놓은 연호, 레이와(令和)
22일 새로 즉위한 나루히토(徳仁) 일왕은 부친인 아키히토 선왕의 평화주의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새 시대를 '레이와(令和, 연호)'라 선포했다.
일본은 중립적인 의미에서 전체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나라다. 사회가 표면적으로 두가지 이상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공기가 이웃나라를 향해 극단으로 치달으면 공격적인 파시즘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하지만 새 일왕이 만든 평화의 '공기'는 정치적 실권을 가진 아베 총리라고 해도 쉽게 무시할 기운이 아니다. 이낙연 총리가 방일을 계획하면서 일본 내 온건·친한·주화파 정치인들과 순차적인 만남을 계획하고, 일본 청년(게이오대)들과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찾은 이유다. 총리는 23일 "기성세대의 상처로 한일 청년들의 미래와 시간을 뺏고 있다"고 일본을 향해 자성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공기'를 읽어냈다.
일본은 그간 한국을 비난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분위기가 지배했다. 그러나 분위기의 변화가 나타나자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일왕 즉위식에 축하사절로 방문한 이 총리는 현지 정계와 언론으로부터 상당한 환영을 얻고 있다. 방일 첫 날(22일)만 해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 않는다"고 했던 총리가, 23일 오후엔 "아베 총리와 24일 단독 면담에서 일정한 결과를 낼 것"이라고 어조를 달리한 배경이다.
아베도 무시못할…아름다운 조화의 '공기'
23일 아베 총리는 본인이 주최한 만찬에서 각국 사절단에 보낸 축하 메시지를 통해 "레이와(令和) 시대는 뷰티풀 하모니(아름다운 조화)를 뜻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리와 아베 총리가 면담을 하루 앞둔 이날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은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한국이 중요한 이웃 나라인 것은 틀림이 없다”며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낙연 총리는 24일 아베 총리와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낙관할 수만은 없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총리가 자연스럽게 스며든 외교력으로 한일 정상의 만남을 어떻게 끌어내느냐가 마지막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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