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44] 집행유예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2019. 10. 22.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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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롯데월드 아쿠아리움에서 손님을 맞던 벨루가가 ‘순직’했다. 이번에 죽은 벨루가는 열두 살짜리 수컷인데 2016년 4월에 폐사한 다섯 살배기 수컷에 이어 두 번째다. 이제 덩그러니 암컷 ‘벨라’만 남았다. 벨루가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멸종 위기 ‘관심 필요’종인데 우리의 삐뚤어진 ‘관심’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

고래는 수염고래와 이빨고래로 나뉘는데, 벨루가는 이빨고래 중에서도 돌고래, 범고래, 상괭이 그리고 왼쪽 앞니가 비틀어져 앞으로 길게 뻗은 일각고래와 더불어 참돌고래상과에 속한다. 주로 북극 근해에 살지만 철 따라 멀게는 6000㎞나 이동하며 산다. 우리 동해까지 다녀가는 벨루가도 있다. 이런 동물을 작은 수조에 몇 년씩 가둬두는 행위는 그 어떤 기준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른 봄 아이들과 논에서 올챙이를 잡아 어항에 넣어 기르다 뒷다리가 나오면 풀어주는 일은 하셔도 좋다. 올챙이는 자기가 잡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고래는 안다. 지금 이 순간 시설에 갇혀 있는 고래는 거의 다 우울증을 앓고 있다. 게다가 롯데월드 아쿠아리움의 수조는 수심이 너무 얕다. 주로 해수면에서 수심 20m 사이를 헤엄쳐 다니지만 종종 700~800m 깊이까지 잠수하며 사는 고래를 수심 7.5m 수조에 넣어 선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접시에 담아내는 격이다.

벨라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영락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무기수 꼴이다. 롯데그룹에 호소한다. 벨라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제발 집행유예로라도 풀어달라. 그룹 회장님도 얼마 전 집행유예로 풀려나 업무를 보고 계시지 않는가? 우리는 제돌이와 그의 친구들을 제주 바다에 방류하는 데 성공해 국제사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롯데만 결심하면 벨라에게 자유를 되찾아줄 수 있다. 재미도 돈도 자유만큼 소중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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