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라'발 화폐 전쟁..달러 패권에 균열 발생할까

배정원 2019. 10. 2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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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2020년 '리브라'로 '세계통화' 노려
각국 정부 압박에 마스터·비자·이베이 발빼
美달러화 vs 中위안화 싸움에 암호화폐 등장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달러 제국에 균열 시작
트럼프 "리브라, 돈이 아니다"라며 맹공 쏟아

직장인 A 씨는 올 가을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가면서 환전을 하지 않았다. 페이스북 계정 내 ‘리브라’를 쓸 예정이기 때문이다. 항공·숙박권은 페이스북과 제휴한 여행 사이트 ‘부킹닷컴’에서 결제했다. 뉴욕에서 택시를 타고, 식사할 때마다 리브라로 지불했다. 예전처럼 한국에 돌아와 남은 달러를 처리할 고민도 없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기업 페이스북이 2020년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개발중인 리브라가 ‘세계 통화’로 군림하는 세상을 상상한 이야기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6월 “돈을 재발명하고, 세계 경제를 탈바꿈해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겠다”며 암호 화폐 발행에 출사표를 던졌다.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리브라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페이스북의 암호 화폐 발행 소식은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이 더 많다. 특히 세계 각국 정부와 금융기관, 정책 결정권자들이 리브라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쏟아내자, 파트너사로 참여했던 마스터카드·비자·이베이·페이팔 등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4일(현지시간) “규제 당국의 압박이 커지면서 리브라 발행 계획에 먹구름이 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화폐 당국의 반발은 거꾸로 페이스북의 암호 화폐가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리브라는 세계 기축통화 경쟁 판도의 새 변수로 부상했다. 중국 위안화와 유로화가 달러 패권을 넘보던 구도에 리브라까지 끼어들면서 각국 통화 당국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리브라’ 등장에 화폐 전쟁 새 국면
페이스북의 리브라 발행 소식에 미국 정부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문제 삼고 있다. 지난해 4월 정보유출 청문회에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가 굳은 표정으로 질의를 듣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금까지 세계 기축통화를 둘러싼 ‘화폐 전쟁’은 패권을 쥐고 있던 달러화와 이에 도전한 위안화·유로화의 싸움이었다. 후발주자인 중국의 위안화는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의 5번째 구성통화로 이름을 올리며 달러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위안화의 부상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됐다. 초유의 위기에 철옹성 같던 달러 제국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됐다. 무한정 창출된 달러 신용이 만들어낸 거품을 지켜본 사람들은 달러가 쥐고 있는 세계 금융에 의문을 제기했고, 달러 패권이 흔들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선진국 중앙은행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돈을 풀어대며 통화질서를 왜곡하는 모습은 기존 체제에 대한 회의까지 일으켰다.

이후 등장한 암호 화폐는 화폐 전쟁의 판을 새롭게 짜고 있다. 암호 화폐는 미국의 달러 패권뿐 아니라 중앙집권형 통화질서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암호 화폐는 직거래가 가능한 블록체인(분산저장)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중앙은행을 비롯한 통제기관은 물론 은행 같은 중개기관 없이 모든 거래가 가능한 구조다.

특히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의 참여로 암호 화폐 업계 판세는 뒤바뀌었다. 페이스북의 월간 활성 사용자는 23억명이다. 페이스북이 인수한 메신저 서비스 왓츠앱의 사용자는 15억명, 사진 공유 소셜미디어 서비스 인스타그램의 사용자는 10억명이다.

방대한 사용자를 확보한 메신저 서비스에 송금과 결제 기능이 결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중국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중국은 노점상들도 현금 대신 위챗페이와 알리페이로 결제를 받을 정도다.


미국·유럽 극렬히 반대…“리브라, 돈 아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리브라는 돈이 아니다"라며 페이스북에 맹공을 쏟아붓고 있다. [사진 로이터]
기존 통화질서에서 본 암호 화폐는 ‘공공의 적’이다. 각국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리브라가 돈세탁·인신매매 등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점을 문제 삼고 있지만, 속으로는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 법정화폐에서 리브라로 자금이 쏠리는 ‘뱅크런’을 우려하고 있다. 국제 자본 이동과 관련한 각국 정부의 정책적 대응 능력에 제약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각국 정부는 리브라에 맹공을 쏟아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진짜 통화는 단 하나”라며 “리브라는 돈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암호 화폐는 기존 화폐를 대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난달 공식적으로 유럽에서 리브라 거래를 금지했다. 미국 상·하원은 청문회를 열어 페이스북을 압박했다. 세계적인 보안 소프트웨어 개발자 존 맥아피는 “각국 정부와 암호 화폐 사이에 이미 ‘전선’이 그어졌다”고 진단했다.

학계와 민간에서도 반대 여론이 팽배하다. 저서 『화폐의 종말』을 통해 디지털 화폐 전환을 주장한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민간 발행 암호 화폐는 법정화폐를 절대로 대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IT기업 애플의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사기업의 암호 화폐 발행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페이스북 ‘고결한’ 명분으로 맞서
‘리브라’지배구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에 페이스북은 금융소외 계층을 위한다는 ‘고결한 명분’으로 맞서고 있다. 선진국 국민은 리브라 같은 새로운 화폐가 필요 없겠지만, 개발도상국의 상황은 다르다는 지적이다. 돈을 벌러 외국으로 나온 이주 노동자는 은행 계좌를 만들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고향 마을에 은행이 없어, 일해서 번 돈을 부칠 수도 없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정부와 중앙은행이 부패한 경우, 통화정책은 엉망이고 극심한 인플레이션(물가상승)에 시달리기도 한다.

페이스북은 백서에서 “(리브라는)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는 세계 17억명의 성인”을 위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리브라를 개발하는 자회사 칼리브라는 “개발도상국 소상공인의 약 70%는 신용이 없고, 이주노동자는 매년 송금 수수료로 250억 달러를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브라 연합에는 ‘포용적 금융’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온 비영리 기구 네 곳이 참여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미디어랩의 ‘디지털 통화 이니셔티브’ 수석 고문을 맡고 있는 마이클 케이시는 리브라에 대해 “원대하고 고결한 목표”라며 “이제껏 은행을 이용하지 못한 인구가 리브라를 통해 새롭게 세계 경제에 편입된다면 그 경제적 효과는 누구도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 정부도 암호 화폐 발행 시동
중국은 다음 달 11일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 축제인 광군제에 맞춰 17조원 규모의 독자적인 디지털화폐를 발행할 계획이다. [사진 AP]
주목할 건 각국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다. 리브라는 경계하면서 이미 자체적으로 암호 화폐 발행에 나섰거나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암호 화폐 시대를 외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저서 『화폐 전쟁』의 중국계 경제학자 쑹훙빙는 “각국 정부는 결국 암호 화폐를 제도권에 편입해 통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 인민은행은 다음 달 11일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 축제인 광군제에 맞춰 1000억 위안(17조원) 규모의 독자적인 디지털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선보이겠다고 발표했다. 하루 거래액만 35조원에 달하는 광군제 기간에 CBDC 발행에 성공할 경우 암호 화폐 시장을 선점하는 효과를 누릴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에는 중국공상은행·건설은행 등 은행권과 알리바바·텐센트 등 IT(정보기술) 기업이 유통에 참여한다.

미국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자체 암호 화폐 구상을 타진한다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15일 보도했다. 폴리티코는 리브라의 출시가 좌절되더라도 다른 대기업이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까닭에 결국 Fed가 자체 암호 화폐를 구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무역 전쟁으로 힘겨루기가 한창인 미국과 중국이 암호 화폐를 발행하게 되면 ‘금융전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다. 미 CNBC는 지금껏 미·중이 무역과 환율 분야의 전쟁은 물론 5세대 이동 통신(5G) 기술에서 앞서나가기 위한 다툼까지 벌여왔는데, 여기에 암호 화폐를 둘러싼 경쟁은 갈등을 악화시키는 또 하나의 긴장 요소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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