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칼럼] 귀주대첩 1000년, 강감찬을 생각하다

이건희 재테크 칼럼니스트 입력 2019. 10. 16.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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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낙성대공원. /사진=뉴시스 DB

‘낙성대는 무슨 대학교인가요?’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문화재청’에서 올린 것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가다 보면 ‘서울대입구’역 다음에 ‘낙성대’역이 나온다. 서울 지리에 어둡거나 시골에 사는 사람 중에는 낙성대를 서울대 옆에 있는 작은 대학 정도로 아는 사람도 있다.

낙성대(落星垈)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별(星)이 떨어진(落) 곳(臺)’을 뜻한다. 고려사의 강감찬 탄생설화를 보면 어떤 사신이 길을 가다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에 거란군을 물리친 장군 정도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조선시대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한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이런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서 이름 뒤에 으레 장군이란 호칭이 붙기에 무신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문신이었다.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란 뜻의 ‘문곡성’(文曲星)으로 불릴 만큼 철저한 문신이었다.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것도 문과였다. 서경유수가 되기 전까지는 군사 관련 경력이 없었으며 내정과 교육, 외교를 담당하는 관직에서 일했다.

관악구 주최 강감찬축제 퍼레이드. /사진=뉴스1 이재명 기자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

귀주대첩 이전에 이미 두번의 거란(요나라) 침입이 있었다. 강감찬이 관직에 들어선 후 10년이 지난 993년에 소손녕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처음 침입했다. 당시 대륙 초원지역 유목민에 ‘야율아보기’라는 통치자가 등장해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북방의 강자로 등극해 있었다. 거란군의 공격에 맞선 첫 전투에서 패해 손실을 입으면서도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외교관인 서희의 담판으로 위기를 넘기고 강동 6주까지 확보했다.

종전 후 한동안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강감찬은 북방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언젠가 거란이 다시 침입할 수 있다고 봤다. 그의 예상대로 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2차 침입을 했다. 고려는 강조의 지휘로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하다가 결국은 장수들이 죽거나 사로잡히고 병력에 큰 피해를 입었다. 신하들 대부분이 항복을 건의했지만 강감찬은 반대했다.

감감찬은 계책을 쓰기 위해 국왕 현종을 일단 나주까지 피신시켰다. 거란에는 국왕이 직접 거란의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를 만나겠다면서 강화를 청했으며 이를 받아들인 거란의 성종이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물러가는 거란군 뒤를 후방의 고려군이 곳곳에서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히고 많은 포로를 구출했다. 훗날 현종은 “그때 강공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됐을 것”이라고 강감찬의 공을 치하했다.

전쟁이 끝난 후 양국관계가 불안한 상태에서 강감찬은 평안도 도지사격인 서경유수가 돼 국경 방위군 핵심부대를 통솔하는 경험을 수년간 쌓았다. 문관으로서 갑작스레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니라 국방문제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거란은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고 강동6주를 돌려주지 않자 1018년에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3차 침입했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보장돼

드디어 강감찬은 고려군 총사령관(상원수)에 임명돼 방어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흥화진 전투에서는 1만여명의 군사를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쇠가죽을 굵은 밧줄로 꿰어 계곡의 물길을 막았다. 그는 적군이 도달했을 때 물을 한꺼번에 내려 보내는 전략으로 거란군을 무너뜨렸다. 성공적인 기선제압, 전격전에 대응하는 유격전, 포위섬멸전, 청야전술(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 등 다양한 작전계획을 세밀하게 세우고 실행해 거란군을 곳곳에서 혼란에 빠트리면서 대승했다.

뜻만 강하다고 좋은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전략이 중요함을 되새기게 된다. 10만명 중 생존자는 불과 수천명이었고 거란군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고 한다.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고 돌아오는 강감찬을 현종이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 금으로 만든 여덟송이 꽃의 금화팔찌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축하연회를 열었다.

귀주대첩에서 대패한 거란은 침략야욕을 포기하게 됐고 두 나라 사이에 평화적인 국교가 성립됐다. 평화란 뜻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말로 포장한다고 만들어지지도 않으며 힘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다.

고려가 거란의 거듭된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자 송과 거란 모두가 고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을 폈다. 송 및 거란과 활발하게 교류를 펼치면서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여러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대립되면서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요즘 시대에 한 나라가 번영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전쟁에서 직접 지휘하며 승리를 거뒀을 당시 강감찬은 일흔을 넘긴 나이였다. 그 시기 70대까지 산 사람도 드물었을 뿐더러 고령에도 전쟁터에서 보여준 활약은 놀랍기만 하다. 지금은 평균수명이 그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길어졌기에 더욱 노후의 삶에 귀감이 된다.

제3차 거란침입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권력과 공직에 연연해하는 사람들이 판치는 시대에 그 의미 깊게 새겨 볼 수 있다. 현종은 강감찬이 사직을 청하자 아쉬워하며 지팡이를 선물로 주면서 3일에 한번이라도 조회에 나오라(출근하라)고 했다.

◆외모보다는 능력이 중요

그 외에도 강감찬으로부터 귀감으로 삼을 점은 많다. 과거시험에 붙은 나이인 36세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다. 빨리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에 집착하며 무리수라도 두고 싶다면 대기만성형 인물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늦게 관직에 들어섰지만 나중에 문하시중(국무총리격)까지 올랐다.

외모는 ‘고려사’에 ‘체모왜루’(體貌矮陋)라고 나와 있을 만큼 작은 키에 볼품없이 생겼다.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외모가 준수하지 못해도 적당히 평을 해주는 게 상례인데 얼마나 못 생겼으면 그렇게 기록했을까 싶다. 송나라 사신이 고려를 방문했을 때 잘생기고 훤칠한 부하에게 좋은 옷을 입혀 앞에 내세우고 강감찬은 뒤에 물러서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경주에 수령으로 부임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작은 키에 곰보딱지 얼굴인 강감찬을 얕봤지만 차차 그의 능력을 보면서 민심이 돌아섰고 결국 그를 따르게 됐다고 했다. 외모지상주의의 사회 분위기에서도 처음에는 외모가 유리한 조건이 되겠지만 결국에는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겠다.

강감찬은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평소 백성들과 같이 해지고 때 묻은 옷을 입고 다녔다. 나라를 구하는 대업을 이뤘음에도 백성과 병사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서 자신은 소박하게 살았다. 거란의 2차 침략이 있은 후에는 자기 재산까지 털어가면서 군대를 양성했다. 남들에게만 어떻게 살라고 말하고 자신은 그러지 않는 내로남불의 공직자들이 있는 현실이 슬프다.

강감찬은 자연을 즐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여생을 보내다가 84세에 타계했다. 요즘 같으면 100세 이상에 해당할 것이다. 고려 3대 임금인 정종부터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과 9대 덕종까지 일곱 임금의 시대를 거치며 살았다. 낙성대 공원에는 강감찬 장군의 기마청동상이 있고 강감찬 영정이 안치된 안국사 경내에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3층석탑이 있다.

2019년은 귀주대첩(1019년) 10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강감찬이 태어난 낙성대에서는 ‘2019 관악 강감찬 축제’가 10월17일부터 19일까지 열린다. 총감독은 ‘한국을 빛낸 사람들 대상’에서 지역축제발전공로상을,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에서 축제연출상을 받은 바 있는 지역축제 전문가 김종원 감독이 맡았다. 축제기간 동안 낙성대 일대에는 고려시대를 재현한 작은 마을이 들어선다.

17일 전야제는 1000명의 구민으로 구성된 합창단 공연, 귀주대첩 승전 기념 클래식 음악회, 강감찬 탄생 및 귀주대첩 전승 이야기를 영상기술로 보여주는 ‘미디어 파사드 쇼’ 등으로 꾸며진다. 18일에는 안국사에서 전통제례 방식의 추모 제향, 인기가수 공연 등이 있으며 19일에는 귀주대첩 출병식과 거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퍼레이드에서는 고려군사, 거란족, 송나라 무역상 등의 모습을 한 구민 1500여명이 관악구청부터 낙성대까지 1.8㎞를 행진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4호(2019년 10월15~2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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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재테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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