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자본의 폭력에 맞선 그들의 역사..'민주노조의 전설'로 [커버스토리]

전현진 기자 2019. 10.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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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37년 후, 투쟁을 기록하다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원풍동지회 사무실에서 원풍 노동자 126명의 이야기가 담긴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를 만든 회원들이 노조 활동 내용이 담긴 옛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양승화·장남수·황선금씨(왼쪽 첫번째·세번째·네번째) 등 4인이 ‘동지’들의 증언을 모아 글로 엮었다. 이상훈 기자 doolee@kyunghyang.com

전두환 정권의 ‘노동계 정화’

폭력과 사표 압박…결혼 유도

2010년 ‘원풍 운동사’ 출간 뒤

국가소송…동지 모임 정례화

이번엔 126명 증언 모아 발간

‘일반 노조원들의 생애’ 기록

지금은 사라진 섬유업체 원풍모방에는 1970~1980년대 가장 민주적인 활동을 펼친 노동조합이 있었다. 원풍 노조는 ‘민주노조의 전설’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상징적인 존재다. 1972년 사측에 따라 움직이는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거나, 1974년 도산 위기에 몰린 회사 경영에 참여해 노사 공동 경영체제를 만든 일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일까.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노동계를 정화하겠다며 첫 목표물로 삼은 대상이 원풍 노조였다. 원풍모방은 민주적인 노조 활동 덕분에 다른 회사보다 근로조건이 좋았고, 조합원들의 정치의식도 높았다. 다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히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조직이었다. 당시 원풍 노조는 5·18민주화운동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틀 만에 모인 돈이 무려 470만원에 달했다.

■ ‘노동계 정화’ 명목으로 노조 탄압

1980년 5월13일 방용석 원풍모방 노조 지부장이 한국노총 집회에서 단상을 점거하고 발언하고 있다.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노조 탄압이 이뤄졌다. 조합장 등 집행부가 “사회불안을 야기했다”는 등의 이유로 수사선상에 올랐다. ‘비상계엄하 노동조합 활동’이라는 당시 정부의 지침에 따라 신규 노조 결성이나 단체 활동이 중지됐다. 또한 ‘노동조합 정화지침’이 시행됐는데 겉으로는 회계 부정이나 노조 간부의 비위 등을 처벌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는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며 사측과 대립각을 세우는 노조 간부들을 탄압 대상으로 삼기 위한 명분이 됐다.

1982년 9월27일 벌어진 폭력사태는 원풍 노조 탄압의 절정이었다. 사측이 결성한 구사대가 노조 사무실을 봉쇄하고 기존 집행부를 상대로 사표를 받아내려 했다. 2010년 나온 <원풍모방 노동운동사>에 당시 상황이 기술돼 있다. ‘담임’으로 불리는 남성 관리자들이 몰려들어 조합 사무실을 봉쇄한 뒤 조합장을 향해 “가랑이를 찢어 죽이기 전에 빨리 사표를 써”라며 욕설을 뱉었다. 단식농성이 이어졌다. 며칠 버티지 못했다. 끌려나간 조합원들은 이후에도 ‘출근 투쟁’을 했다.

1981년 양승화 부조합장(오른쪽)과 김향자 대의원이 노조 사무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찰과 노동부 등 당국은 조직적으로 노조 탄압의 기세를 높였다. 1982년 10월30일 경찰은 ‘전언통신문’을 통해 “원풍모방 정상화를 위한 특별지시는 사회 안정을 위한 중요사안이므로 단순한 노사 관계라는 개념을 떠나 국가적 차원에서 관계기관이 총력 협조하여… (퇴사하지 않으면) 혼사뿐 아니라 자손들의 장래까지 영향이 미치”는 점을 설명해 퇴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순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노동부는 조합원을 극렬·주동·동조·방관으로 분류하는 ‘성분 분석표’를 만들었다. 당시 전체 조합원은 869명(여성 636명, 남성 233명)이었는데, 여성 114명과 남성 5명이 ‘극렬’로, 여성 30명과 남성 203명이 ‘방관’으로 분류됐다. 경찰과 사측은 이 성분표에 따라 A(극렬)~D(방관)로 급을 나누었고 A급은 구속, B급은 해고 및 구류, C급은 각서 및 사표, D급은 출근보장으로 처리했다.

■ ‘원풍 동지’들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

원풍동지회 회원 70여명이 지난 5월1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재심 소송에서 법원의 ‘화해권고’ 판단을 받아낸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원풍동지회 제공

벌써 30년도 더 된 과거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원풍 노조원들이 오랜 시간 기록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다. 이들은 원풍 노조의 출범과 활동 내역, 폭력사태로 강제 해고를 당한 뒤 이어진 각종 장외 투쟁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원풍모방 노동운동사>를 출간한 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기로 한 데 이어 2011년에는 원풍동지회라는 모임을 결성해 그동안 1년에 한두 차례씩 하던 모임을 정례화했다. 회원 176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원풍 노조 지부장을 지내기도 한 방용석 전 노동부 장관(74)은 원풍동지회를 “지지 않는 꽃”이라고 했다. 그는 “원풍이라는 이름으로 모여온 게 40년인데, 이렇게 오랜 세월 한 사업장 단위의 조합에서 수많은 조합원들이 모여온 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많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지도부 중심이 아닌 일반 노조원을 중심으로 이뤄진 조합, 즉 민주노조였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아무리 민주노조가 활동했어도 저임금 노동이 만연한 시절이었다. 그래도 원풍 동지들은 그 시절이 그립다. 방 전 장관은 “원풍에선 사람냄새가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에 출간된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는 원풍 노조가 그동안 해온 기록의 연장선에 있다. 조합원 43명의 심층 인터뷰를 정리해 두 권짜리 자료집으로 엮은 적은 있다. 방대한 인터뷰를 통해 원풍에서의 삶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6년 가을부터 ‘100인의 증언록’을 만들자는 목표로 시작된 구술 작업은 3년이 걸렸다.

책 속에 담긴 원풍 동지들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고향을 떠나 원풍모방에서 일하게 된 젊은 날이 그 시작이다. 책에는 “가난의 절망을 어떻게 희망으로 바꾸었는지, 저학력의 열등의식을 딛고 어떻게 삶의 지혜를 채워갔는지”가 진솔하게 담겼다. 가난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지나, 원풍모방에서 노조를 만나 새롭게 꿈을 키웠다거나 야간학교에 입학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각종 소모임에서 즐겁게 활동하던 추억을 증언하는 목소리가 유독 많았다.

그리고 이어진 건 원풍 노조에 대한 국가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원풍 노조를 ‘깨기’ 위해 조합원들을 잡아들인 뒤 사표를 강요하고, 경찰이 사측과 구사대를 만들어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끌고 나가는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노동자가 빨갱이로 몰려 신산한 삶을 살아온 이야기”도 이어졌다. 해고자가 된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려 취업을 하지 못했고 “인간으로서의 실존은커녕 생존조차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결혼은 마지막 도피처였지만, 이내 냉랭한 현실과 다시 마주해야 했다. 이런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오다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인정을 받았을 때 모두가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편집위원인 양승화 원풍동지회 초대회장(62)은 “그동안 나온 노동운동에 대한 저술 작업은 지도자·간부들이 중심이었다면, 이번에 정리한 증언록은 일반 조합원과 노동자들의 생애를 기록했고, 1970~1980년대의 시대적 배경이 담겼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편집위원인 장남수씨(61)는 “지식인의 시선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직접 겪은 삶과 노동운동에 대해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책이 정리될 수 있도록 가장 신경을 썼다”고 했다.

1982년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조합원들이 함께 떠난 야유회.

126명의 증언을 담는 작업은 대부분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에 있는 원풍동지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인터뷰는 4명의 회원이 맡았다. 시간을 내기 힘든 회원 한두 명만 글로 대체했고 나머지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구술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한 이들이다. 1997년 이미 세상을 떠난 이제호 부조합장의 회고록은 아들 이상훈씨가 썼다. 이씨를 포함, 원풍 조합원 자녀 15명도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통해 바라본 원풍모방에 대한 기억을 보탰다.

이들이 삶의 타래를 풀어낸 시간만 200~300시간은 훌쩍 넘는다고 한다. 노동 현장의 민주화를 이끈 투사들의 삶이 여기에 담겼다. 19일 오후 3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손배소송, 사법농단에 휘말려 헌재까지 우여곡절…“명예회복 뒤에는 같은 노인층 위한 복지활동 힘쓸 것”

원풍모방 노동자의 삶이 짓밟힌 건 순식간이었지만, 명예회복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은 명예회복의 과정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했다.

2000년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법’에 따라 3차에 걸쳐 원풍모방 노동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위로’ 명목의 생활지원금이 지급됐다. “귀하는 대한민국의 민주헌정 질서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켰다”는 내용의 인증서를 주기도 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선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 해고를 당한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피해자’로 인정됐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에 배상을 요구한 건 경찰 등을 앞세워 조직적으로 노조를 파괴하고 취업을 방해했던 것에 대해 국가의 인정과 사과를 받고자 함이었다.

1·2심에선 대부분 승소했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을 다루는 논리로 ‘소멸시효’와 ‘재판상 화해’라는 법리를 처음으로 적용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위로금을 받은 것은 이미 국가와 ‘화해’를 한 것이기 때문에 배상을 청구할 수 없으며 손해배상을 주장할 수 있는 시효가 지났다는 것이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던 이들은 다시 ‘사법농단’의 피해자가 됐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로 사건을 끌고 갔고, 지난해 8월 헌재는 “민주화보상법상 보상금에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금이 포함돼 있지 않다”고 결정했다. 또 “국가가 불법구금·고문 등 허위자백으로 유죄 판결하고 사후에도 조작·은폐로 진상규명을 저해했음에도 불법행위 시점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2018년 9월28일 원풍 노동자들은 헌재 결정을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이 받아들여졌다.

각 재판의 최종심으로 사건이 돌아갔고, 서울고법에서는 재심을 받은 135명에 대해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원고’는 1인당 200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이들은 법리적으로는 재판을 받을 권리가 없었지만 국가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법원의 화해 권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국가폭력에 짓밟힌 지난 세월을 모두 보상받을 수는 없었지만, 나약한 노동자들은 힘을 합쳐 사과를 받아냈다.

이제 남은 건 재심 결정으로 대법원에 돌아가 계류 중인 손해배상청구 소송이다. 이 사건이 마무리되면 원풍모방이 2010년부터 이어온 국가를 상대로 한 법적 투쟁은 일단락된다.

황선금 원풍동지회 회장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회복 신청을 하지 못한 동지들이 있다”며 “이들의 명예회복을 돕는 특별법이 ‘과거사법’의 하나로 국회에 계류 중인데, 이 법이 제대로 통과돼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했다. 나아가 원풍동지회는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황 회장은 “시민사회에 원풍 민주노조의 활동을 알리고 홍보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며 “우리도 이제 노령층에 들어가게 되는데, 노인복지 분야에서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이웃 노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고 실현하는 장기적인 활동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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