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우리 마을사

2019. 10. 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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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서울 해방촌의 공간과 시간과 사람을 기록하는 해방촌 마을기록단

박승화 기자

서울 남산 자락 아래에 자리한 오래된 동네, 해방촌(용산동2가). 어둑어둑해지자 낡은 연립주택과 카페, 술집의 불이 하나둘 켜졌다. 9월23일 저녁,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신흥시장을 찾았다. 그곳의 안쪽에 해방촌 마을기록단의 사무실이 있다. 해방촌 마을기록단은 이름처럼 해방촌이라는 공간을 기록하는 주민들의 모임이다. 2016년 6월에 결성돼 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날 해방촌 마을기록단의 심수림씨, 정명숙씨, 이종철씨, 이규원씨가 회의하기 위해 모였다. 올해 6월부터 초등학생과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짝꿍 특집’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모였단다. 학생들과 우리 마을 지도 그리기, 마을 연표 만들기 등 마을을 기록하는 놀이 프로그램이다. 미래 세대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둘러보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놀이터는 그들이 사는 해방촌이다.

책 만들고, 간판과 소리 수집

해방촌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 용산구 용산동2가 일대를 칭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이북에서 월남한 실향민들과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임시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다. 실향민의 고단한 삶을 그린 소설 <오발탄>의 배경이 된 곳이다. 당시 많이 있던 판잣집이 사라지고 지금은 젊은 예술가, 외국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이주자의 동네가 되었다.

해방촌에 산 지 7년 됐다는 심수림씨가 <108계단 이야기> <기록으로 보는 마을공동체> <해방촌 사람책> 등 다양한 기록물을 펼쳐 보였다. 3년간 해방촌 마을기록단에서 만든 자료다. 토박이 주민들의 이야기로 엮은 사람책, 상점 간판 모으기, 마을 소리 수집 등을 했다. 사라진 장소인 진달래 미용실에 얽힌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어 진달래 미용실 지도도 그렸다.

건축사무실에서 일하는 심씨는 “가능성이 많은 해방촌에” 들어온 또 다른 이주민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수첩에 마을 이곳저곳을 기록했어요. 혼자만의 기록 활동이었죠. 그러다 함께할 주민들을 만났어요.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 모임을 여는데 한 달간 마을 기록 활동 이야기를 나눠요. 내가 보지 못한 마을을 기록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었어요. 같은 곳에 살지만 각자 보는 마을이 다 달랐어요.” 심씨는 “방송에서 소개하는 맛집, 카페 등이 있는 해방촌이 아니라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 해방촌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일상의 발견 같은 재미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심씨가 이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양하다. “평범한 직장인부터 공부하는 학생, 미술 공방을 하는 예술가, 외국인 등 라이프스타일이 다른 사람이 모여 살아요. 그들의 삶의 풍경이 다채로워요.” 그래서 이곳에 온 주민들의 개인사를 기록하는 작업도 흥미롭단다.

서울 해방촌 마을기록단의 이규원, 이종철, 심수림, 정명숙씨(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이젠 떠날 수 없는 마을

해방촌 마을기록단의 구성원들 역시 다양하다.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있고 건축가, 다큐멘터리 감독, 회사원 등 직업도 다르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정명숙씨는 우연히 동네에서 마을기록단 모집 포스터를 보고 모임에 함께했다. “이 동네가 궁금하고 이곳을 다큐멘터리로 남기고 싶었어요.” 정씨는 해방촌 마을기록단의 사람들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최근에 집 계약을 연장했어요. 마을에 마실 나갈 곳이 생기고 만날 친구들이 생겼어요. 그게 마을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요. 이곳을 계속 기록하고 싶고 함께할 친구들이 생기니 떠날 수가 없어요.”

이종철씨는 정육점, 순댓국집, 분식집 등 오래된 가게와 그 가게를 지키는 사람들을 가상현실(VR) 영상 기법을 활용해 기록했다. 서울에서 찾기 힘든 “고즈넉하고 소박한” 이 동네의 매력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2∼3년 사이 그가 찍은 가게 중 문을 닫은 곳도 여럿 있다. “몇 개월 사이에 가게가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 곳이 많아요. 변화 속도가 빠른 곳이에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해방촌의 모습이 많아지고 있단다. 이곳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 내몰림)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해방촌 마을기록단은 해방촌의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는 ‘네거티브 문화재’도 기록했다. 그중 하나가 해방촌 108계단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전쟁 사망자 위령제를 지내기 위해 경성호국신사를 지으면서 참배길로 만든 것이다. 마을에 사는 80대 할머니가 들려주는 ‘108계단’ 이야기를 활자로 남겼다. “할머니가 소학교에 다닐 때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때 108계단 이야기가 나왔어요. 당시 일본인 교사가 108계단을 지나 호국신사에 가서 절하고 오라고 했대요. 안 그러면 따귀를 맞았다고 해요.”(이종철씨) 어릴 때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역사의 한 페이지다.

해방촌 주민들의 관점에서 기록한 마을 기록은 그 지역사회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해방촌 마을기록단의 이규원씨는 “내가 사는 마을에서 느끼고 관심을 갖고 보는 것들에 대한 기록에는 우리의 해석이 담겨 있어요. 이런 기록이 주관적이고 사소한 거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기록하는 우리의 기록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라고 강조했다.

그들이 지난 3년간 만든 해방촌 기록물.

서대문, 성산동 등 지역마다 마을기록학교

이들처럼 서대문, 성산동, 창천동 등 마을을 기록하는 주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역에 마을기록학교가 열리고 마을기록활동가로 일하는 이들도 생기고 있다. 주민 주권 시대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의 관 주도 방식이 아닌 주민들이 기록의 주체자로 나서는 것이다.

서울 성북구 정릉의 정말기록당(정릉 마을기록 주민이야기마당)이 그 활동의 중심에 있다. 정릉 지역의 주민들과 주민단체들이 2018년 3월에 만든 모임이다. 최연희 정말기록당 상임활동가는 “올해 10월에 열리는 마을 축제에서 오래된 미용실과 이발소와 골목의 그림 등 기록전시회를 열 예정”이라고 했다. 2010년부터 정릉에 살고 있는 최씨는 “마을 이야기는 누구와도 할 수 있는 소재예요. 오래 산 분들뿐 아니라 최근에 이사 온 분들 그리고 세대가 달라도요. 서로 이야기하며 같은 지역 주민으로서 공감대가 형성돼요. 몰랐던 이웃을 알게 되죠”라고 말했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과의 수다 속에 기록이 시작된단다. “외부인들이 묻지 않거나 궁금해하지 않은 마을의 이야기를 찾아내요. 그걸 끄집어내 기록하는 재미가 있어요. 마을 기록 활동을 하니 마을에 정이 들고 그러니 이곳을 떠나기 싫어 이곳에 살아갈 이유를 계속 만드는 것 같아요.” 최씨는 앞으로도 이 마을을 오래, 깊이 들여다볼 예정이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공동체의 삶이 있는 마을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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