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의 만남·이별 그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감독 정지우 [인터뷰]
[경향신문]

만남과 헤어짐. 만남과 이별이라고 하면 쉬이 연인 관계를 떠올린다. 물론 연인간의 만남과 이별만큼 크게 느껴지는 게 드물긴 하지만, 사람들은 살아가며 많은 것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한 사람 속에서도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게 있다. 기억이다. 아름다운 추억이든, 상처로 남은 가슴 아픈 기억이든, 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기억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 매개는 길에서 우연히 본 옛 친구일수도 있고, 오랜만에 짐을 정리하다 발견한 물건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매개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는 어느 새 그 시절 기억을 소환해낸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유열의 음악앨범>은 1994년 동명의 KBS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 첫날 우연히 만난 1975년생 동갑내기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청춘 멜로 영화다. 개봉날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이 영화의 감독 정지우(51)를 만났다.

정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은 <해피 엔드>(1999)다. 감독 데뷔한 지 20년이 넘는 감독도 개봉날 떨릴까. 인사 겸 개봉날 심정이 어떤지 물었다. 정 감독은 20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해피 엔드> 개봉하는 날 서울극장 앞에 관객들이 줄을 서서 표를 샀다. 아침 9시 전부터 보기 위해 오신 분들이었다. 인근 카페 2층에서 보다 첫회가 매진됐다는 소식에 서로 축하한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렇게 조마조마한 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박스오피스가 수치로 다 나오고, 개봉 전 여러 행사로 관객들과 만나는 시간도 있어 막 떨리진 않는다”고 말했다.
요즘 영화계는 스릴러·범죄액션 등 장르영화가 주를 이룬다.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반전이나 심장을 조이는 긴장감, 자극적이거나 스트레스를 날릴 통쾌한 요소가 없으면 흥행 성적이 저조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 멜로드라마, 1990·2000년대 이야기다. 심지어 10·20대 대다수는 ‘유열’이 누군지도 모른다. 정 감독은 “제목 얘기하면 젊은 사람들은 다 ‘유희열’의 오자라 생각하더라. <유희열의 스케치북>처럼 유희열씨가 하는 새 예능인줄.(웃음)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그런 반응에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멜로가 잘 안 만들어지고, 오랜만에 만들어진다는 게 그만큼 (관객 동원이) 어렵다는 의미다. 얼마나 어려울지 아니까 (영화제작사) 제안을 받고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인공지능도 편리하고 좋지만 닿을 듯 닿지 않고 연락이 두절되는 그런 순간도 사람들 마음을 울리는 것 같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 대한 영화는 영원히 다시 만들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젊은 관객의 반응에 대한 우려와 기대도 나타냈다. 그는 “정말 짧게 스킵하면서 유튜브를 보는 세대 입장에서 이 영화의 속도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창작자 입장에서 굉장히 두렵기도 하고, 한 명의 영화인으로서도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라고 했다.

이 영화는 마치 사연을 읽고 노래를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처럼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중간에 당시 유행했거나 발표된 노래들을 삽입했다. 신승훈·이소라·유열·핑클·모자이크·루시드폴 등 국내는 물론 콜드플레이 같은 해외 아티스트들 곡도 포함돼 있다. 정 감독은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94~2005년에 발표된 300곡 리스트를 만들었고, 스태프·배우 다함께 이야기 전개를 도와주거나 인물의 속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들로 선곡했다”고 말했다. 콜드플레이의 명곡 ‘픽스 유(Fix you)’는 영화를 준비하면서부터 확정된 노래였다. 그는 “‘픽스 유’ 라이브 공연을 보면 (보컬) 크리스 마틴이 간주 때 뛰기 시작하는데 심장이 쿵쿵거리는 잊을 수 없는 매혹이 있다. 그 이미지가 강렬해 뛰는 장면을 영화에 녹였다. 정말 사랑스러운 장면”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가사가 이야기나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연관성은 있지만 적절한 거리감을 주려고 애썼다고 전했다. 또 노래가 나올 때 일반적인 볼륨보다 더 크게 들리도록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음악을 크게 들을 공간이 잘 없지 않나. 볼륨감이 풍부해진 상태로 듣는 쾌감을 관객에게 주고 싶었다. 라이브 공연까지는 어렵더라도 그렇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미수와 현우 등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이 진짜이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배우들에게 자율·즉흥적으로 행동하게 했다. 그러다보니 미수가 현우에게 ‘다 본 만화책을 달라’며 손을 내민 장면에서 현우는 손을 잡아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만화책이 아닌 손을 내미는 ‘진짜’인 장면이 담겼다. 정 감독은 “(롱테이크가 많아) 편집할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힘들었지만,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더라도 장면이 너무 좋아서 진짜인 순간을 포기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주연뿐 아니라 조연들의 연기도 빛난다. 특히 미수와 현우의 ‘정신적 지주’ 은자를 연기한 배우 김국희는 진짜인 순간을 여러 번 만들어낸 일등공신이다. 정 감독은 “김국희 배우는 이번 영화의 기쁨”이라며 “오디션으로 선발했는데 오디션 때 뮤지컬 때 했던 넘버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입장료를 내지 않고 공짜로 쇼를 보는 기분이었다. 제가 몰랐지, 뮤지컬로는 조연상을 여러 번 받은 실력자였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뛰어다니며 배우들에게 디렉션을 하는 ‘열혈감독’이다. 그는 “과거에 비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간이 부족해졌다”며 “감독 입장에서 힘들긴 하지만 이렇게 운영하는 게 방향이 맞으니 감독이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가 영화계에도 적용이 돼 감독 입장에서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는 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하는 감독이다. <해피 엔드> 이후 <사랑니>(2005) <다섯 개의 시선>(2006) <모던 보이>(2008) <은교>(2012) <4등>(2016) <침묵>(2017) 등 다양한 색깔의 영화를 연출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그는 “운빨”이라며 “한국사회가 워낙 역동적으로 빨리 변해 현역이 길지 않다. 영화뿐 아니라 어느 영역에서나 마찬가지다. 체력이 되는 한 계속 뛰어야죠”라고 말했다.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기억하는 한 그의 열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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