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형법 들여와 첨삭·가감.. "한국사회 맞는 기준 필요" [탐사기획-'은별이 사건' 그후]

- 2019. 8. 2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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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동의연령 13세, 어디서 왔나/ 출처불명의 기준 왜 유지하나 / 미성년자 의제강간 제도 연구 거의 없어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등재 논문 고작 4건 / 이마저도 대부분 해외 법제도 소개 초점 / 日 의제강간 연령 제정 어떻게 / 日, 19세기말 프랑스법 본따 12세 설정 / 1907년 독일식 형법 도입 13세로 상향 / 한국, 100년 전 구시대 기준 고집한 셈 / 국내 실정 반영 재논의 시급 / 美, 州마다 연령 기준 16∼18세까지 다양 / 日 형법과 별개로 음행조례 만들어 보호 / 전문가 "100년 전의 13세는 지금과 달라"
‘13세 미만의 부녀를 간음하거나 13세 미만의 사람에게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298조 또는 제301조의 예에 의한다.’ 제정 형법 제305조(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의 내용이다.

오늘날의 형법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9월 제정됐다. 성관계에 동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는 근거가 되는 ‘13세’ 조항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 기준은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말뚝’처럼 우리 사회에 박혀 있다.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5년 처벌 조항에 301조의2가 추가되고, 이명박정부 시절인 2012년 성폭력 범죄의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일괄 변경되며 ‘13세 미만의 사람’으로 고쳐진 게 전부다.

형법 제정자들은 왜 13세를 기준으로 삼았을까. 13세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형법 제정 때 국회 회의록을 봐도 그에 관해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이를 확인할 문헌 기록이나 사료도 없는 듯합니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 일본에서 건너온 것 아닐까 합리적으로 추정하는 거죠. 만약 어떤 논의가 있었다면 기록이 따로 남아 있지 않을까요?”(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20일 세계일보 취재 결과 이 분야 전문가들도 정작 13세 기준이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우리 형법 제정 당시 일본 형법을 거의 그대로 따른 점, 당시 일본 기준이 13세였던 점을 들어 “일본 법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나 “입증할 사료가 있느냐”는 취재팀 질문에 모두 “없다”고 답했다.
1953년 3월23일 국회 정기회의 속기록에는 판사 출신 국회의원이던 김종순이 “우리가 사실상 부끄러운 것은 (해방 후 8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문자로 된 법문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이라며 형법안을 의회에 긴급상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50년대 별다른 사회적 합의 없이 만든 ‘출처불명’의 13세 기준이 7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의제강간 연령 상향 움직임이 매번 변죽만 울리다 끝난 데에는 이처럼 법 제정 배경과 근거가 불분명한 점도 한몫했다. 다른 국가들이 사회적 논의를 거듭하며 자국의 사회·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성적 동의 연령(age of consent)’을 찾아간 것과 대조적이다.

◆“100년 전 일본 기준 왜 고집하나”

취재팀이 의제강간 논문 발표자와 국책연구기관, 시민단체, 학계, 법조계 등을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그동안 국내에서 미성년자 의제강간 제도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된 ‘의제강간’ 논문(제목 기준)은 고작 4건뿐이다. 이마저 대부분 외국의 연령 기준과 법제도를 소개하고 한국과 비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2013년 관련 논문을 발표한 김한균 연구위원은 “해외에서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물학적 이유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이유를 근거로 기준을 올리거나 내려왔다”며 “우리는 이제껏 그런 논의가 부재했으며 이 때문에 이 제도가 보호하는 법익에 대한 시각도 합의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현행 기준이 ‘일본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우리 사회가 단 한 번이라도 13세 아동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 의미에 대해 연구를 해본 적이 있느나”며 “100년 전 남(일본)의 법을 베껴 지금까지 안 바뀌고 있는데, 그때 일본 사회와 지금 우리 사회가 어찌 같을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미국만 봐도 주마다 연령 기준이 16세부터 18세까지 다르듯 우리도 한국 사회에 맞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행 13세의 기원이 일본일 것이라는 주장은 ‘추정’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 형법과 우리 형법이 여러 면에서 닮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죠.” 원로 형법학자인 신동운 서울대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왜 우리의 의제강간 연령이 13세로 정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법이 일본과 대체로 유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1953년 형법 제정 전까지는 따로 우리 형법이 없는 탓에 일본 법전을 계속 쓸 수밖에 없었어요. 법을 만들려 해도 자료나 형법학자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기준 하나를 가져와 우리 여건에 맞게 첨삭·가감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죠. 그때는 우리말 형법이 최우선적 과제였습니다. 그때 가져온 것이 바로 일본 형법이었습니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자기네 형법을 고치려고 만들다가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폐기한 개정안을 가져다 쓴 것이었죠.”

◆“일본 형법도 프랑스 형법에서 시작”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 과정을 거쳐 13세를 기준으로 삼은 걸까.

그동안 일본의 13세 기준을 놓고 국내에선 초등학교 졸업 연령이나 혼인 풍습, 가임 연령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됐다. 취재팀은 보다 정확한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 ‘인간과 성’ 교육연구협의회 본부 간사이자 일본 주오대 겸임강사인 성교육 전문가 박혜정씨 도움을 받아 일본국립국회도서관(NDL), 일본국립정보학연구소(CiNii)에 오른 각종 논문과 국회 회의록, 학술지 등을 바탕으로 그 연원을 추적해봤다.

우선 일본의 의제강간 연령은 19세기 말엔 12세였으나 1907년 13세로 한 살 오른 뒤 현재에 이르렀다. 관련 논문에 따르면 메이지 정부는 1873년 ‘일본 근대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인 법학자 보아소나드의 주도 하에 ‘형법 제1초안’을 만든다. 이는 당시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열강이 일본과 맺은 불평등조약에 따라 보유한 영사재판권(영사가 주재국에서 자기 나라 법률로 재판하는 권리) 철폐가 목적이었다. 열강들이 일본에 “먼저 근대적 사법체계부터 갖추라”고 요구하자 일본 정부가 프랑스인 학자를 ‘용병’처럼 부른 것이다.
일본 법무성의 ‘성교 동의 연령에 관한 논의 경위 등’이란 문건을 보면 1907년 일본 정부는 ‘여자의 발육 정도’ 등을 근거로 기존 12살이었던 의제강간 연령을 13살로 높인 것으로 나와 있다.
와세다 대학에서 출간한 ‘일본형법초안회의록’(1977)에 따르면 당초 보아소나드는 프랑스 형법을 본떠 성추행, 강간 등 범죄 성립을 따질 때 기준이 되는 동의 연령을 각각 12세와 15세로 구분했다. 이에 일본 편집위원들이 둘 사이의 차이가 뭔지 물었으나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측은 “연령을 둘로 나누면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이를 12세로 통일시켰다. 즉 일본의 연령 기준은 프랑스법에서 출발한 셈이다.

이후 일본은 공화국인 프랑스 대신 군주국인 독일 헌법에 기초한 메이지 헌법을 1890년 시행하며 형법 역시 독일식으로 바꿔 1907년 신형법을 만들었다. 이때 의제강간 연령 기준도 12세에서 13세로 상향된다. 1907년 의회에 제출된 ‘형법개정안 이유서’를 보면 ‘12세를 13세로 정한 것은 될 수 있으면 음란행위에 물들지 않는다는 희망, 생리(월경)상 12세 이상이라기보다는 13세 이상 쪽이 적당하지 않을까’라는 것이 이유였다.

2015년 2월 ‘제6회 성범죄 벌칙에 관한 검토회의’에서 배부된 ‘성교 동의 연령에 관한 논의 경위 등’이란 문건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1906년 12월19일 형법 개정안을 위한 법률위원회가 기존 의제강간 기준 연령을 13세 또는 14세로 올리는 수정안 투표를 실시해 과반인 8명이 지지한 13세안이 14세안(4명)을 누르고 가결됐다. 이때 ‘법학자인 호즈미 노부시게 위원이 의학박사인 사카키 야스사부로에게 위탁·조사한 여자 초경 평균 연령을 들어 13세에 찬성했다’는 취지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바로 이 기준이 100년도 더 지난 지금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100년 전과 지금은 달라”

이후 일본은 1974년 ‘형사 책임 연령과 조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외국 입법례(서독·스웨덴·스위스 형법)를 들어 기준 연령을 14세로 상향하려 했으나 무산됐다. 그렇다고 일본이 18세 미만 청소년들을 성인의 성적 접근으로부터 방치하는 건 아니다. 형법과 별개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른바 ‘음행조례’를 만들어 13세 이상 청소년까지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유가쿠 도쿄 시바파크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예를 들어 ‘도쿄도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에 관한 조례’를 보면 18세 미만 청소년과 성교 또는 유사성교를 한 사람은 2년 이하 징역이나 100만엔(약 114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된다”며 “다만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이 목적이므로 청소년 간의 관계는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법률 조항만 13세일 뿐 일본의 의제강간 연령 기준은 사실상 18세인 셈이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2019년의 한국은 1953년, 혹은 1907년과 비교해 사회·문화·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며 “현행 연령 기준을 고집하는 건 100년 전의 13세와 지금의 13세가 같다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일본의 ‘음행조례(淫行?例)’란=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을 도모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정한 조례안을 통칭하는 말로, 정식 명칭은 아니다. 일본 법원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해 심신이 미성숙한 청소년과 부당하게 이뤄진 성행위’를 음행으로 보고 처벌한다. 단, ‘진지한 교제 관계에 있다’는 전제로 청소년끼리의 관계는 처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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