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형법 들여와 첨삭·가감.. "한국사회 맞는 기준 필요" [탐사기획-'은별이 사건' 그후]
오늘날의 형법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9월 제정됐다. 성관계에 동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는 근거가 되는 ‘13세’ 조항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 기준은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말뚝’처럼 우리 사회에 박혀 있다.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5년 처벌 조항에 301조의2가 추가되고, 이명박정부 시절인 2012년 성폭력 범죄의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일괄 변경되며 ‘13세 미만의 사람’으로 고쳐진 게 전부다.
형법 제정자들은 왜 13세를 기준으로 삼았을까. 13세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형법 제정 때 국회 회의록을 봐도 그에 관해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이를 확인할 문헌 기록이나 사료도 없는 듯합니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 일본에서 건너온 것 아닐까 합리적으로 추정하는 거죠. 만약 어떤 논의가 있었다면 기록이 따로 남아 있지 않을까요?”(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100년 전 일본 기준 왜 고집하나”
취재팀이 의제강간 논문 발표자와 국책연구기관, 시민단체, 학계, 법조계 등을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그동안 국내에서 미성년자 의제강간 제도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된 ‘의제강간’ 논문(제목 기준)은 고작 4건뿐이다. 이마저 대부분 외국의 연령 기준과 법제도를 소개하고 한국과 비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2013년 관련 논문을 발표한 김한균 연구위원은 “해외에서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물학적 이유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이유를 근거로 기준을 올리거나 내려왔다”며 “우리는 이제껏 그런 논의가 부재했으며 이 때문에 이 제도가 보호하는 법익에 대한 시각도 합의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현행 기준이 ‘일본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우리 사회가 단 한 번이라도 13세 아동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 의미에 대해 연구를 해본 적이 있느나”며 “100년 전 남(일본)의 법을 베껴 지금까지 안 바뀌고 있는데, 그때 일본 사회와 지금 우리 사회가 어찌 같을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미국만 봐도 주마다 연령 기준이 16세부터 18세까지 다르듯 우리도 한국 사회에 맞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죠.” 원로 형법학자인 신동운 서울대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왜 우리의 의제강간 연령이 13세로 정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법이 일본과 대체로 유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1953년 형법 제정 전까지는 따로 우리 형법이 없는 탓에 일본 법전을 계속 쓸 수밖에 없었어요. 법을 만들려 해도 자료나 형법학자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기준 하나를 가져와 우리 여건에 맞게 첨삭·가감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죠. 그때는 우리말 형법이 최우선적 과제였습니다. 그때 가져온 것이 바로 일본 형법이었습니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자기네 형법을 고치려고 만들다가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폐기한 개정안을 가져다 쓴 것이었죠.”
◆“일본 형법도 프랑스 형법에서 시작”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 과정을 거쳐 13세를 기준으로 삼은 걸까.
그동안 일본의 13세 기준을 놓고 국내에선 초등학교 졸업 연령이나 혼인 풍습, 가임 연령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됐다. 취재팀은 보다 정확한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 ‘인간과 성’ 교육연구협의회 본부 간사이자 일본 주오대 겸임강사인 성교육 전문가 박혜정씨 도움을 받아 일본국립국회도서관(NDL), 일본국립정보학연구소(CiNii)에 오른 각종 논문과 국회 회의록, 학술지 등을 바탕으로 그 연원을 추적해봤다.
이후 일본은 공화국인 프랑스 대신 군주국인 독일 헌법에 기초한 메이지 헌법을 1890년 시행하며 형법 역시 독일식으로 바꿔 1907년 신형법을 만들었다. 이때 의제강간 연령 기준도 12세에서 13세로 상향된다. 1907년 의회에 제출된 ‘형법개정안 이유서’를 보면 ‘12세를 13세로 정한 것은 될 수 있으면 음란행위에 물들지 않는다는 희망, 생리(월경)상 12세 이상이라기보다는 13세 이상 쪽이 적당하지 않을까’라는 것이 이유였다.
2015년 2월 ‘제6회 성범죄 벌칙에 관한 검토회의’에서 배부된 ‘성교 동의 연령에 관한 논의 경위 등’이란 문건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1906년 12월19일 형법 개정안을 위한 법률위원회가 기존 의제강간 기준 연령을 13세 또는 14세로 올리는 수정안 투표를 실시해 과반인 8명이 지지한 13세안이 14세안(4명)을 누르고 가결됐다. 이때 ‘법학자인 호즈미 노부시게 위원이 의학박사인 사카키 야스사부로에게 위탁·조사한 여자 초경 평균 연령을 들어 13세에 찬성했다’는 취지의 기록이 남아 있다. 바로 이 기준이 100년도 더 지난 지금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일본은 1974년 ‘형사 책임 연령과 조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외국 입법례(서독·스웨덴·스위스 형법)를 들어 기준 연령을 14세로 상향하려 했으나 무산됐다. 그렇다고 일본이 18세 미만 청소년들을 성인의 성적 접근으로부터 방치하는 건 아니다. 형법과 별개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른바 ‘음행조례’를 만들어 13세 이상 청소년까지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유가쿠 도쿄 시바파크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예를 들어 ‘도쿄도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에 관한 조례’를 보면 18세 미만 청소년과 성교 또는 유사성교를 한 사람은 2년 이하 징역이나 100만엔(약 114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된다”며 “다만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이 목적이므로 청소년 간의 관계는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법률 조항만 13세일 뿐 일본의 의제강간 연령 기준은 사실상 18세인 셈이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2019년의 한국은 1953년, 혹은 1907년과 비교해 사회·문화·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며 “현행 연령 기준을 고집하는 건 100년 전의 13세와 지금의 13세가 같다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유영재, 입장 삭제 ‘줄행랑’…“처형에 몹쓸짓, 부부끼리도 안 될 수준”
- "결혼식 장소가 호텔?… 축의금만 보내요"
- 박명수 “주는대로 받아! 빨리 꺼져”…치킨집 알바생 대학 가라고 밀어준 사연 감동
- 아이 보는데 내연남과 성관계한 母 ‘징역 8년’…같은 혐의 계부 ‘무죄’ 왜?
- “엄마 나 살고 싶어”…‘말없는 112신고’ 360여회, 알고보니
- 반지하서 샤워하던 여성, 창문 보고 화들짝…“3번이나 훔쳐봤다”
- "발가락 휜 여자, 매력 떨어져“ 40대男…서장훈 “누굴 깔 만한 외모는 아냐” 지적
- 여친 성폭행 막던 남친 ‘11살 지능’ 영구장애…가해男 “징역 50년 과해”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