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사의 변방, 말갈인을 찾아서
⑫두만강 유역 말갈인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이라고도, 예맥이라고도 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1989년 두만강에서 2000㎞ 떨어진 중국 산시성 시안. 건물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당나라 시기 무덤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현지 고고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이 유물에 흥분한 이들은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이었다. 이 묘지의 주인이 당나라 관리로 살았던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이다. 묘비에 적혀 있는 이름은 ‘이타인’(李他仁·609~675). 흥미로운 점은 이타인이란 이름이 그동안 중국에서 발견되었던 고구려 유민의 성씨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11명의 고구려인 묘지가 나왔는데, 모두 왕족인 ‘고’씨와 ‘천’씨였다. 이씨 성의 고구려인은 이타인이 처음이었다.
이타인의 고향은 ‘책주’(柵州), 즉 지금의 훈춘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유역이라는 점이 곧이어 밝혀졌다. 최초의 두만강 출신 고구려인이 발견되면서 고대사학계에서는 이타인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혈연적인 계통이 아니다. 바로 이타인이 고향에서 2000㎞ 떨어진 시안에 묻히면서까지도 ‘두만강 출신의 고구려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과 역사 분쟁으로 발해와 고구려가 우리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발해와 고구려에 쏠린 관심은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말갈과 여진에 대한 평가를 더욱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쪽이 발해와 고구려사를 지키는 주요한 논리로 ‘발해의 상층부는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기층인 말갈인과는 달랐다’는 논리를 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말갈은 한국사와 완전히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라는 오해마저 주었다. 말갈이나 여진 같은 북방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회색지대에 놓여 있고, 국내엔 제대로 된 전공자도 없다. 그사이 중국이 말갈과 여진을 일방적으로 자기들 역사로 편입한 상황이다. 한국과 중국의 정치적 역사 해석으로 인해 우리 역사의 일부였던 말갈은 이방인이 되었다.
고고학이 전하는 말갈의 실체는 다르다. 최근 러시아와 연변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로 말갈이 백두대간을 따라 연해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살던 우리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두만강 유역은 한국과 북방사를 이어주던 역동적인 역사의 공간이었다.
고구려인으로 산 두만강 말갈인
말갈 7부족은 만주 일대의 각 강을 끼고 농사보다는 사냥, 채집에 기반을 둔 호전적인 사람들이었다. 말갈이 중국에 알려진 것은 서기 6세기다. 말갈이 고구려로부터 독립해서 만주 일대 곳곳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고 난 이후다. 그 뒤 말갈은 발해에 포함되었다가 발해 멸망 뒤엔 여진으로 성장해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이어졌다. ‘퉁구스족’이라고 불리는 만주 일대의 원주민들이 바로 말갈의 후예이다. 워낙 남아 있는 자료가 적다 보니 연구자가 거의 없었고, 대신에 소련 시절에 동아시아를 조사하던 러시아 학자들이 연구의 맥을 이어왔다.
다행히 최근에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말갈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은 고조선 시기부터 옥저인들이 살다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말갈의 일부인 백산말갈이 등장했다. 고구려에 옥저나 말갈인이 복속된 것인데, 문제는 고고학 자료였다. 아무리 발굴을 해도 이 지역에서 제대로 된 고구려 유적은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이타인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다. 제대로 된 고구려 유물은 찾아볼 수 없는 두만강 유역 출신임에도 이타인은 자신을 고구려 사람으로 자처했다. 즉, 이타인을 비롯한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며 동시에 고구려인으로 살아갔음을 의미한다. 두만강 유역은 옥저와 말갈의 터전인 동시에 고구려의 땅이었다. 말갈이라면 무조건 오랑캐이며 다른 혈연적인 사람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틀린 것이다. 고구려는 일찌감치 두만강 유역을 간접 지배했으며, 두만강 유역의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처음에 두만강 유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고구려와 언어, 생활풍습이 비슷했던 옥저였다. 하지만 서기 4세기를 기점으로 그들은 주로 산속에서 살며 사냥을 하는 말갈로 바뀌었다. 이렇게 주민이 바뀐 데에는 두만강 유역의 지리적 환경에 원인이 있다. 두만강 유역은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가파른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 그 사이에 좁은 평야가 발달한 지형이다. 게다가 기후마저 한랭하다. 그러니 농사에만 의존할 수 없고, 사냥이나 채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때에 따라 강가에 마을을 만들어 농사를 짓던 옥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호령하던 말갈이 되기도 했다.
동해안을 따라서 두만강 유역과 이어지는 강원도도 마찬가지다.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 또는 예맥이라고도 했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지역을 점령했지만, 고고학 발굴을 해보면 정작 강원도 지역의 기층문화는 거의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고구려 이후 만주 일대로 영역을 넓혀나간 말갈은 점진적으로 한국사에서 멀어지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서기 6세기께부터 만주 북쪽의 말갈은 고구려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후 말갈은 발해의 기층민으로 다시 편입되었다가 발해가 멸망하자 여진으로 거듭나며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말갈의 후예인 여진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서 대륙을 지배했다.
모든 여진이 중원으로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로 편입된 여진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여진의 일파는 함경도에 있었고, 그들은 조선이 건국되며 한국사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조선의 건국에 기여한 이지란이 있고, 함경도에는 여진 시대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다. 말갈에서 여진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산악지역에서 주로 가죽을 가공하고 사냥을 하던 사람들로 이어졌다. 고려시대 양수척, 수척, 화척 등을 거쳐서 조선시대의 백정으로 계승되었던 배경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등장한 발달한 소고기 가공 및 다양한 가죽과 모피의 가공 등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죽과 관련된 선진적인 기술은 말갈 이후로 한반도 산악지역의 사람들을 통해 계승된 것이다.
한편, 한국과 중국사로 편입되지 못한 말갈의 후예들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소수민족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수많은 말갈 계통의 부족들은 18세기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진출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대표적인 말갈의 후예가 바로 나나이족(중국에서는 혁철족이라 불림)과 우데게인이다. 나나이족은 우수리강과 흑룡강 유역에서 여름에 회유하는 연어를 잡는 사람들이고, 우데게인은 험한 산속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련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국민가수였던 콜라 벨디, ‘슈퍼주니어’ 출신 배우 한경이 바로 나나이족 출신이다. 비록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나라로 갈라져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말갈의 문화와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 주변에 숨어 있다.
말갈, 오랑캐에서 유라시아로
말갈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사실 두만강 유역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북방사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지 잘 보여준다. 한국, 만주, 유라시아 역사의 교차점인 두만강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 좁았다. 이제까지 우리의 북방사 인식은 ‘한국사인가 아닌가’를 두고 벌이는 소모적인 논쟁만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정치적인 시각으로 과거 사람들의 역사를 섣불리 일개 국가의 역사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오해만을 초래할 뿐이다. 제대로 된 연구도 없이 ‘한국사인지 아닌지’를 잣대로 결론을 내버리는 것은 ‘모든 아시아 역사는 중국사’라고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재단하는 중국의 역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남북한의 화해 무드와 유라시아 신북방정책에 대한 기대로 시베리아 열차와 이어지는 두만강 유역이 주목받고 있다. 경제적인 효과와 통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안의 변방이었던 두만강 유역과 그 지역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역사 속의 변방인 말갈에 대한 재평가야말로 한국과 북방 유라시아사를 잇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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