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일본의 경제침략은 시작됐는데

김준기 경제부장 입력 2019. 7. 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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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이 2011년 8월 CNN에 출연해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외계인의 지구 침략설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때다. 크루그먼은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대규모 재정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오던 터다. 하지만 보수 경제학계는 재정확대가 국가채무 증가로 이어진다며 반대했고, 오바마 행정부의 경기진작책도 ‘찔끔’ 수준에 그쳤다. 크루그먼의 얘기는 외계인 침략의 위기가 조성되면 정부는 (국가채무는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방어망 구축을 위해 막대한 지출을 해야 하고, 이를 통해 불황이 해결된다는 거다. 사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 막을 내린 데는 뉴딜정책의 힘도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결정타였다. 전쟁으로 미국 경제가 총동원 체제가 되면서 대공황을 불러온 수요부족, 투자부족이 일거에 해소됐다.

최근 한국을 강타한 일본의 수출규제는 크루그먼의 외계인 침략과 비슷하다. 정부는 국회에 계류 중인 6조7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에 일본 수출규제 대응책으로 2700억원을 추가 편성했다. 올해 본예산(469조원)의 1.5%에 불과한 추가 재정 투입으로 경제를 살린다는 것이 언감생심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그 추경안조차 28일 현재 국회에 제출된 지 95일이 되도록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 정부가 추경안을 낼 때 올해 경제성장률을 0.1%포인트 높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처리가 늦어지면서 이 효과는 점점 약화되고 있다.

추경 처리가 안되는 건 자유한국당의 반대 때문이다. 한국당의 속내는 추경을 통해 0.1%포인트라도 성장률이 높아지면 내년 총선에서 정부·여당을 공격할 ‘경제파탄’이라는 재료가 희석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 재정확대를 통한 경기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앞세운다. 지난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올 2분기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1.1%로 1분기의 역성장(-0.4%)에서 크게 호전됐다. 그러나 저조한 1분기 실적에 따른 기저효과의 영향이 커 경기가 회복됐다고 볼 순 없다. 2분기 성장률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기여도는 각각 1.3%포인트와 마이너스 0.2%포인트다. 정부 부문이 성장을 이끌었다. 이를 놓고 한국당은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의 제 이름은 세금주도추락이다’라는 대변인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또다시 국가 재정을 퍼붓는 추경을 만능열쇠인 양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보수언론들도 ‘세금 풀어 억지로 띄운 성장률’ ‘언제까지 재정 퍼부어 성장할 수 있겠나’ 등등으로 박자를 맞춘다. 그리고 세금을 내리고, 규제를 풀어 경제를 살리라고 한다.

정부의 힘으로만 성장하는 경제는 당연히 제대로 된 게 아니다. 그래도 기업이나 가계가 움직이지 못하면 정부라도 나서야 한다. 지난 5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제조업 재고율은 외환위기 때 이후 가장 높고, 가동률은 크게 떨어졌다. 물건이 안 팔리니 공장이 놀고 있다. 수출도 줄고 내수도 지지부진해서다. 기업들이 투자할 이유가 없다. 세계 경제가 하강하는데 외국에서 물건을 더 사가길 바라긴 어렵다. 부채는 많고, 허술한 사회안전망으로 미래까지 불안한 가계가 소비를 늘릴 여유도 없다. 정부라도 재정을 풀어 소비와 투자의 막힌 물꼬를 트고 민간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사정이 이런데 정부의 재정지출을 무조건 악(惡)으로 모는 것은 마치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가만히 있으라’라고 한 선내방송과 다를 바 없다.

재정을 확대하자는 주장과 세금을 깎고 규제를 풀자는 주장은 왜 번번이 맞설까. 두 주장이 각각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 보면 이유가 짐작이 될 수도 있다. 재정확대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세와 규제완화는 주로 부자나 대기업들에 혜택이 간다. 대공황과 싸우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며 재정투입을 늘리고 노동자 보호 정책과 사회보장 제도를 강화했다.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높이는 게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요증진에 더 효과적이라 본 것이다. 물론 이때도 보수층의 반발이 컸다.

경제를 살리려는 이유는 단지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 시민들의 삶이 불안해지면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스템이 위협받는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효과적으로 극복되지 못하면서 트럼프가 집권한 것처럼. 지금 한국에서 경제를 살리자며 외계인 침략설까지 거론할 필요가 없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본의 경제침략 앞에서 정치권이 추경을 놓고 이래선 안된다.

김준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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