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6만원에 원정 일손 할머니들..길 잘못 들었다가 '참변'

최승현·권순재 기자 2019. 7. 2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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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경북 봉화 고랭지 근무 일용직 16명 충남 홍성서 새벽 1시에 6시간 이동
ㆍ탑승자 9명, 불법체류 신분 외국인
ㆍ농번기 일손 부족 농촌 현실 그대로

22일 오전 강원 삼척시 가곡면 풍곡리 도로에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복돼 16명의 사상자를 낸 승합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다. 연합뉴스

고랭지 채소 수확 작업을 위해 새벽 길을 달리던 승합차가 강원 삼척 지방도 급커브길에서 뒤집혔다. 충남 홍성에서 오전 1시에 집을 나선 60~70대 할머니들과 30~40대 외국인노동자들이 차에서 쪽잠을 자다 4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치는 변을 당했다.

새벽과 밤, 멀리 떨어진 일터로 위험하게 장거리 이동하던 ‘고단한 차’에서 일어난 참사였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부족한 일손을 메꾸고 있는 고령화된 농촌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2일 오전 7시33분쯤 강원 삼척시 가곡면 풍곡리 가곡자연휴양림 인근 지방도에서 15인승 그레이스 승합차가 왼쪽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경사지로 전복됐다. 이 사고로 운전자 강모씨(61·충남 홍성군)와 정모씨(61·여·충남 홍성군), 태국인 ㄱ씨(44)와 ㄴ씨(34)가 숨졌다.

또 승합차에 타고 있던 김모씨(78·충남 홍성군) 등 내국인 5명과 태국인 ㄷ씨(41) 등 외국인노동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차량 탑승자는 모두 홍성·청양 지역에서 일을 구해 떠난 60~70대 할머니들과 외국인 9명이었다.

경상을 입은 외국인 3명(태국인 추정)은 사고 직후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에 종적을 감춰 경찰이 소재 파악에 나섰다.

사고 현장은 참혹했다. 승합차 본체는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바퀴가 하늘로 향한 채 전복된 차 밑에 깔린 일부 노동자들은 의식을 잃어 신음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차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꽝’하는 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됐다”면서 “정신을 차린 뒤 기어서 차 밖으로 나와보니 여러 명이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사고 승합차는 이날 오전 1시 충남 홍성에서 출발해 경북 봉화군 석포면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당초 이들은 봉화군 석포면 고랭지 밭에 오전 7시쯤 도착해 채소 수확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점심시간과 폭염에 따른 1~2시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부상을 당한 한 할머니는 “6시간 이상 달려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자 탑승자 중에는 ‘밥도 먹지 못한 채 괜히 너무 멀리 온 것 같다’는 푸념도 나왔다”며 “몇몇 사람은 혹시 운전자가 졸 것을 우려해 간혹 말을 건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승합차엔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어 장시간 이동할 때 불편함이 많았다”고 했다.

부상자 구조 22일 오전 강원 삼척시 가곡면 풍곡리 도로의 승합차 전복 사고 현장에서 119 대원들이 인명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고랭지 채소 수확하러 나선 봉화, 6시간 달려도 안 나와” 저임금 외국인 2명도 숨져…현장 가드레일 ‘무등급’ 확인 운전자, 10년 전 ‘판박이 사고’…불법체류 3명 종적 감춰

실제 15인승인 사고차량엔 사고 당시 16명이 타고 있었다. 도로교통법에는 10% 초과인원은 허용된다고 규정돼 있다. 16명이 탑승해도 법규상 정원 초과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인원이 탑승할 경우 비좁은 공간으로 인해 피로도가 높아져 사고 발생 시 부상을 당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고가 일어난 도로의 가드레일은 안전 등급이 없는 ‘무등급’인 것으로 확인됐다. 급한 내리막 굽은 도로여서 높은 등급 가드레일이 설치돼야 하지만, 도로 개통 당시 설치된 울타리가 그대로 남아 피해를 키운 한 요인이 됐다.

전복한 승합차의 탑승자 16명 중 9명은 외국인이다. 고령화로 인한 일손 부족 문제에 직면한 농촌지역에서는 고육지책으로 농번기에 대부분의 작업을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농가 인구 102만838가구 231만4982명 중 65세 이상 노인이 103만4718명으로 44.6%를 차지하고 있다.

강원도 고랭지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김모씨(64)는 “힘든 농작업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당 10만원이 넘는 내국인에 비해 일당이 싼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으면 대규모 농사를 짓지도 못할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봄철 전라도 등 남쪽 지역에서 마늘 수확작업 등을 마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력사무소나 모집책 등을 통해 여름철 고랭지 채소와 관련한 일거리가 많아지는 강원도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농가에서 합법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방법은 고용허가제와 외국인계절근로자 제도가 있으나 농촌에 할당된 인원은 1만여명에 그치고 있다.

100만이 넘는 농가 수에 비해 합법적인 외국인 노동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이에 불법체류자들이 농촌에서 일하는 사례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달 말 기준 불법체류 외국인은 36만6566명에 달한다.

경찰 관계자는 “삼척에서 사고가 난 승합차에 타고 있다가 숨진 2명과 부상자 7명(잠적 3명 포함) 등 외국인 노동자 9명 전원이 체류기간이 만료된 불법체류자로 확인됐다”며 “할머니와 이들은 이날 일당 6만원을 받기로 하고 승합차에 탑승했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경찰조사 결과, 이날 숨진 운전자 강씨는 10년 전에도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에서 같은 차종의 승합차를 몰다 굴착기를 추돌해 마을 주민 등 5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치는 사고를 내 안전운전 의무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전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승현·권순재 기자 cshdmz@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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