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잉크 안 쓰는 컬러프린터를 만들다
투명하고 유리질인 고분자를 굽히거나 잡아당기면 금이 가거나 깨지기 직전에 종종 부분적으로 하얗게 된다. 이런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을 크레이징(crazing)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으로 본다. - 고승환, ‘네이처’ 6월 20일자에 실린 해설에서
주간 과학저널인 ‘네이처’와 ‘사이언스’에는 논문이 15편 정도 실리는데 이 가운데 네다섯 편은 해설이 함께 한다. 논문은 워낙 전문적이라 에세이에서 다루지 않으면 볼 일이 거의 없다. 반면 논문을 설명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해설은 관심 가는 걸로 두세 편 읽는다.
‘네이처’ 6월 20일자에 실린 해설 다섯 편 가운데 ‘크레이지 컬러(Crazy colour)’라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해설을 쓴 사람이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고승환 교수다.
유명 저널인 ‘네이처’나 ‘사이언스’ 에 한국 과학자의 논문이 실리는 것도 흔치 않지만, 해설이 실리는 건 드문 일이다. 전자가 한 달에 한 편이라면 후자는 일 년에 한 편 정도일까.
논문이야 과학자가 학술지에 투고하는 것이지만 해설은 학술지가 논문의 분야를 꿰고 있는 과학자에게 청탁하는 것이므로 영국(‘네이처’)과 미국(‘사이언스’) 학술지가 굳이 한국 과학자까지 떠올리지는 않을 텐데, 그만큼 고 교수가 적임자란 얘기일 것이다.
결함 이용해 구조색 구현
아무튼 해설을 읽어보니 크레이지는 ‘미쳤다’는 평범한 뜻이 아니라 크레이징(crazing)이라는 전문용어를 형용사 형태로 쓴 말장난이다(영어권 사람들도 ‘미친 색’으로 해석해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지 않을까).
크레이징은 도자기 표면에 발라진 유약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 그물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그런데 투명한 플라스틱도 굽히거나 당길 때 미세한 금이 가면서 불투명한 흰색이 되는 경우가 있다. 투명한 플라스틱이 변형될 때 나타나는 백탁을 크레이징이라고 부른다.
플라스틱은 고분자 가닥이 서로 엉켜 있는 상태다. 서로 화학결합으로 묶여 있지 않아도 단단한 고체를 유지하는 건 긴 고분자 사이에 반데르발스힘(Van der Waals force)이라는 전기적인 인력이 고분자 전체에 걸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면 고분자 사이에 반데르발스힘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해’ 공간이 생기면서 투과하던 빛이 난반사를 일으킨다. 그 결과 플라스틱은 투명성을 잃고 하얗게 보인다.
일본 교토대 과학자들은 투명한 플라스틱의 크레이징을 조절해 하얗게 보이는 대신 색을 띠게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크레이징으로 생긴 플라스틱 내부의 공간이 균일해 반사될 때 특정 파장의 빛만 보강간섭을 일으켜 해당 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색소 없이 미세 구조에 따른 광학 현상으로 나타나는 색을 구조색(structural colour)이라고 부른다.
몰포나비 날개 비늘 표면의 나노구조
비 온 뒤 고인 물웅덩이에 기름이 흘러들면 여러 색으로 보이는데, 얇은 막 간섭 현상이라고 부른다. 물과 기름 모두 무색투명이지만 물 위에 얇게 퍼진 기름막에 빛이 부딪쳐 반사할 때 기름막 두께에 따라 보강간섭을 하는 파장이 달라지므로 여러 색이 나타난다. 색이 일정하지 않은 건 기름막의 두께가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에 보강간섭을 하는 파장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께가 변하는 기름막과는 달리 빛의 간섭 현상이 일어나는 구조가 견고해 색이 바뀌지 않을 때 구조색이라고 부른다. 자연계에서는 곤충의 외골격과 새의 깃털에서 구조색을 흔히 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몰포(morpho)나비 날개 비늘의 구조색이다.
중남미 열대림에 사는 몰포나비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파란색 날개를 지니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색소를 추출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색소가 아니라 날개 비늘 표면의 독특한 구조로 빛의 간섭현상이 일어나 특정 파장의 빛(파란색)만 살아남은 결과라는 게 밝혀졌다.
일본 연구자들은 플라스틱을 굽히거나 잡아당기는 물리적 힘 대신 용매에 담가 크레이징을 일으키는 방법을 개발했다. 플라스틱을 아예 녹여버리는 강력한 용매 대신 아세트산처럼 작용이 온화한 용매를 썼다. 용매가 플라스틱에 스며들면서 고분자 사이에 약간의 틈이 벌어지면서 플라스틱이 부푼다. 그 결과 일정한 크기의 미세구멍과 미세골격으로 이뤄진 공간이 생겨 투과하는 빛을 교란시킨다.
몰포나비의 날개 비늘 표면 구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빛의 보강간섭으로 인한 구조색의 효과를 크게 하려면 일정한 간격의 구조가 반복돼야 한다. 연구자들은 정상파 광학(standing-wave optics) 기술을 써서 빛에 민감한 플라스틱에 일정 간격으로 고분자 사이에 교차반응이 일어나게 했다. 교차반응이 일어난 층은 용매가 침투하지 못하고 일어나지 않은 층은 구조가 취약해져 침투해 변형된다. 그 결과 비늘 표면 구조처럼 다층 구조가 형성됐다.
잉크젯 프린팅보다 해상도 훨씬 높아
한편 미세구멍과 미세골격의 크기는 플라스틱 재료인 고분자의 종류나 평균 분자량, 정상파 광학에 쓰는 빛의 파장, 용매의 종류, 용매에 담글 때 온도 등 여러 변수를 바꿔 조절할 수 있다. 원하는 파장의 빛에 대해 보강간섭이 일어나게 맞출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어떤 구조색이라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논문을 보면 이 방법으로 플라스틱 표면에 만든 이미지가 여럿 나와 있다. ‘모나리자’ 이미지의 경우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사용한 용매가 다르다. 그 결과 미세 구조의 크기가 달라 보강간섭을 일으키는 빛의 파장도 달라 다른 색을 띠는 것이다.
플라스틱에 교차반응이 번갈아 일어나게 하는 정상파 광학 기술은 최소 1.8㎛(마이크로미터. 1㎛는 100만분의 1m) 크기로도 가능해 1만4000dpi(인치 당 화소수)의 해상도가 구현할 수 있다. 반면 일반 잉크젯 프린팅의 해상도는 아무리 좋아도 1200dpi 수준이다. 잉크 방울의 크기를 더 이상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고 교수는 해설에서 “예전에는 쓸모없다고 치부되던 현상을 이용해 간단하고 저렴하게 색을 내는 방법을 개발했다”며 “크레이징을 조절하는 방법은 투명 플라스틱 표면에 잉크 없이도 색을 입히는 것 외에도 전자소자나 센서 등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8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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