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배워가는 '사는 집'의 계급

김태훈 기자 입력 2019. 6. 15. 10:36 수정 2019. 6. 1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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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직장인 윤일환씨(39)는 올봄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준공된 지 오래됐지만 넓이에 비해 가격이 싸다는 장점을 보고 첫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아내와 초등학생 아이의 불만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입주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바로 옆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비교가 된다는 얘기였다. 학생 대부분이 대형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 소수 학생은 무리에 끼기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윤씨의 딸은 집에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대놓고 따돌림당하는 처지는 아니었다. 윤씨 아파트 주변에 있는 다세대주택에서 사는 학생들은 보다 노골적인 따돌림을 당한다는 얘기를 듣고 윤씨는 헛웃음이 나왔다. 윤씨는 “우리 애가 ‘걔는 며칠이 지나도 옷을 안 갈아입어’라고 말하길래 야단치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참 가관이었다”며 “심지어는 그 대형 아파트단지에 사는 애들 중에서도 집 평수에 따라 끼리끼리 갈라진다는 얘길 듣고 도대체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하나 싶었다”고 말했다.

아파트와 단독·다세대 주택이 섞여 있는 서울 시내의 모습. / 우철훈 선임기자

주거빈곤에 따른 심리적 위축

살고 있는 집이 거주자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말해준다는 얘기는 이미 광고에도 공공연히 등장했을 정도여서 차별적인 언어로 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차별이 적어도 체면을 차리느라 대놓고 말하길 꺼리는 어른에 비해 어린이와 청소년들 사이에서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거의 양극화가 더욱 심각해지면서 어린 시절부터 계급의 격차를 느끼는 경우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주거빈곤을 겪는 어린이들은 최소한의 적정조건만 갖춰진 곳에서 생활했을 경우 차별에 따른 심리적 위축을 훨씬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서울 강북구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박모씨(42)는 같은 아파트단지 안에서도 건물의 ‘높이’ 하나로 아이들이 격차를 바로 느낀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박씨가 자주 방문하는 임대아파트는 분양된 아파트와 같은 단지로 분류되지만 다른 동보다 층수가 낮다. 임대아파트 입주민 중에서도 박씨가 들러야 하는 가구는 한부모가정이나 조손가정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박씨는 단어 하나하나를 주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차별적인 표현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마다 ‘부모 없는’이란 욕이 기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만난 그 아이는 한부모가정 애인데 자기도 그런 욕은 거리낌없이 쓸 정도로 신경쓰지 않으면서 ‘너는 집 없잖아’라는 욕이 더 기분 나빴대요.” 박씨가 전해 들은 차별의 언어는 ‘크고 높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작고 낮은 임대’와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우월을 주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과거 담당하던 지역 역시 영세한 가정이 적지 않았으나 동네 전체의 경제적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편이었다. 극심하게 대비되는 주거환경이 뒤섞인 동네일수록 차이가 차별로 직결되는 경험을 많이 봐왔다는 게 박씨의 얘기다.

이런 현상이 아동 주거빈곤 문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모습은 지하·반지하 주택이 서울에 주로 모여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집의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 중 지표면보다 낮은 부분이 50% 이상을 차지하면 지하, 50%에 미달하면 반지하로 분류된다. 2017년 국토교통부의 주택실태조사를 보면 반지하 가구로 분류되는 집은 전체 주택의 2% 남짓이다. 그러나 지역별 분포를 보면 수도권, 특히 서울에 크게 집중되어 있다. 전체 반지하 주택의 60%가 서울에 있고, 95%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있다. 전국에서 0.2% 수준인 지하 주택도 서울과 경기에 각각 절반씩 몰려 있다.

“친구 초대해본 적 없다” 66.9%

아동 가구로만 초점을 맞춰도 결과는 비슷하다. 아동이 있는 전체 가구 중 지하·반지하를 비롯한 주거빈곤가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도 서울(14%)이다. 광역시 중에서는 인천(9.6%)만 아동 주거빈곤가구 비율의 전국 평균인 9.4%보다 높았고, 다른 광역시들은 모두 평균보다 낮았다. 이외에 전국 평균보다 아동 주거빈곤가구의 비율이 높았던 지역은 제주(12.3%)·강원(10.6%)·전남(10.2%) 세 곳뿐이어서 도시와 농촌 안에서도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조사를 진행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관계자는 “도시 중에서는 일찍부터 극심한 과밀화를 겪은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대도시에서 아동 주거빈곤 비율이 높았고, 농촌지역에서는 상·하수도 같은 도시기반시설이 부족해 주민 전체가 주거상황이 열악한 곳에서 이 비율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농촌지역에서는 주거빈곤이 나타나더라도 주변 이웃과의 격차는 크지 않은 반면,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밀집한 주거지역 안에도 여러 층위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실제 어린이들이 체감하는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특히 빈곤이 단순히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에만 그치지 않고 또래집단 안에서의 인간관계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경기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한 아동 주거빈곤 조사에서도 주거빈곤가구 아동은 ‘친구를 집에 초대해본 적이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66.9%였다. 일반가구 아동의 36.2%와 큰 차이가 난다. ‘생일잔치 등의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비율도 주거빈곤가구 51.7%, 일반가구 27.6%로 차이를 보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도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이뤄질 수 없는 희망사항으로 남는 현실이다.

당사자인 아동의 입장에서 부동산 가격 격차를 비롯한 빈부격차 문제의 근원까지 따질 수는 없어도 피부로 와닿는 이 문제가 자라면서 점차 쌓여가는 절망감과 우울감의 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서울 은평구의 주거빈곤가구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 정희수군(11·가명)의 걱정은 자신의 앞날까지 향해 있다. “부모님은 ‘너만 열심히 하면 좋은 데서 살 수 있어’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기죽지 말고 힘내라는 의미라는 건 아는데, 제가 보기에도 우리 부모님 열심히 사세요. 그런데도 이사를 자주 해봤자 비슷비슷한 집이었어요. 제가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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