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취급받던 풀.. 가치 깨달은 요리사들이 직접 찾아나섰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2019. 6. 8.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이해림의 더 맛있는 맛] (3) 식재료 탐구 시대

호흡 사이로 솔 내음이 훅 끼쳤다. 주재료인 고등어의 진득한 구수함이 입안에 엉겨 붙을 때쯤, 2㎜ 남짓한 작은 솔방울이 향을 터트리며 말끔한 선을 그었다. ‘미쉐린 가이드’ 별 하나를 가진 한남동의 레스토랑 ‘모수’의 기억이다. 별 둘인 논현동 ‘알라프리마’를 떠올리면 방아 향부터 뇌리에 맴돈다. 30여 가지 푸성귀가 한 그릇에 담긴 샐러드 요리였다. 치즈와 유청, 브라운 버터를 사용한 미온의 소스가 다양한 채소의 맛과 향을 어우르는 동안에, 방아 잎 향이 색다른 기억을 만들어냈다. 토마토에 대한 강렬한 기억도 있다. 한우 파인 다이닝 코스 중 하나로 나온, 고기 한 점 없는 채소 요리. 토마토와 바질이 자아내는 조화는 아삭한 식감과 쾌청한 전환으로 기억된다. 삼성동 ‘라이프’의 토마토 샐러드다.

서초동 ‘오프레’의 슈거스냅 껍질콩은 올봄을 모두 축약한 듯한 경험이었다. 물오른 봄의 생동이 연한 물성의 푸른 콩알과 수분 가득한 껍질에 다 담겼다. 곁들여진 옥살리스(사랑초)의 새콤함은 흐뭇한 덤이었다. 봄나물의 기억 또한 올해는 각별하다. 신사동 ‘임프레션’에서 본격적인 코스 시작 전에 내는 한 입 거리로 맛본 봄나물들이 특별하게 각인됐다.

이색 작물 재배하고 토종 재료 다시 보는 식재료 탐구 열풍

요즘 한국의 파인 다이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졌다. ‘한국의 레스토랑은 이제 재료로 기억된다’. 지난 몇 해간, 한식 파인 다이닝 황금기를 지나오며 요리사들은 일제히 전통 장에 주목했고, 고조리서를 넘겨 보며 가장 한국적인 맛에 천착했다. 된장 아이스크림부터 막걸리 식초에 절인 생선 요리까지 한국 발효의 맛에 대한 세계관이 확립됐고,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기본양념인 장맛, 그리고 선조들의 조리 기술을 익히고선 그다음 단계로 자연스레 확장되어 이어진 것이 재료에 대한 관심이다.

이색 작물부터 토종 재료까지, 요리사들의 관심은 가리는 곳 없이 강산 곳곳에 닿았다. 더 희귀하고, 더 특별하게. 손꼽히는 요리사들이 일제히 지방의 오일장과 작은 어항, 농부의 밭과 들녘을 탐구하고 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추구”하는 교과서적 태도부터, “안 먹어본 맛을 닥치는 대로 맛보는” 먹보 본성의 기세 좋은 탐구자, “남들에게 없는 나만 쓰는 특별한 재료”를 발굴하려는 사냥꾼까지 기질도 다종다양하다. 세간에서 ‘세계 3대 진미’로 꼽히는 트러플과 푸아그라, 캐비아 같은 고가의 희귀한 재료보다도, 이제는 발에 밟히던 소박한 들풀 하나가 요리사의 이목을 끌고 한 편의 공연 예술이나 다름없는 파인 다이닝 접시 위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모수 안성재 셰프의 솔방울은 갓 맺힌 아기 솔방울을 피클로 담아둔 것이다. 3월께 안성재 셰프와 요리사들이 산에 가서 한꺼번에 채집해 두고 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도 광범위하게 관심을 두면 특별하게 기억되는 맛을 발견해 갈 수 있다”는 것이 안 셰프의 지론이다. 알라프리마 김진혁 셰프의 방아 잎은 가족의 텃밭에서 온 것. 그는 “30년 전에는 뻔하게 여겨졌던 재료가 현재엔 새로운 것일 수 있다. 계절마다 변화하는 재료에 대해 폭넓게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는 것은 요리사가 가질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라고 말한다.

(왼쪽부터)알라프라마 김진혁 셰프. 알라프리마의 샐러드 요리에 사용되는 각양각색 채소들. 철마다 다른 재료를 조합해 맛을 낸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왼쪽부터)모수 안성재 셰프. 모수의 고등어 요리에 사용된 솔방울 피클. 깨알만 한 솔방울을 봄에 따 보존했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왼쪽부터)라이프 김호윤 셰프. 라이프의 토마토 요리에 사용된 재료들. 김호윤 셰프가 동분서주하며 여러 곳에서 모아 오는 재료들이다. 맨 윗줄 오른쪽 끝이 사위질빵순이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해 10월 마르쉐@ '씨앗밥상' 팝업 런치를 준비하기 위해 농장을 둘러보는 셰프들과 농부. 왼쪽부터 신창호 셰프, 이장욱 농부, 이지원, 강민구 셰프. / 마르쉐@

라이프 김호윤 셰프와 오프레 이지원 셰프, 임프레션 서현민 셰프의 공통점은 이색 작물을 다품종소량생산 하는 근교농, ‘준혁이네 농장’에서 운영하는 ‘셰프스 팜(Chef’s farm)’에 구획을 분양받았다는 것이다. 밍글스 강민구, 주옥 신창호, 권숙수 권우중 셰프 등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들이 구획을 가진 셰프스 팜은 셰프가 원하는 작물을 농부의 도움을 받아 손수 재배하는 형태의 공유 텃밭이다. 경기도에 자리한 이 밭에 셰프들이 각각 주 2회꼴로 드나들며 밭일을 하고, 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김호윤 셰프의 토마토, 이지원 셰프의 껍질콩이 준혁이네 농장에서 왔다. 준혁이네 농장은 200여 종의 작물을 재배하는데, 해외에서 요리 경험을 쌓은 요리사들이 찾던 이국적인 재료, 파인 다이닝에서 즐겨 사용하는 마이크로 허브(다 자라지 않아 장식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한)와 잎사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맛과 향, 모양을 내는 꽃이 주된 작물이다. 요리사들을 위한 이색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은 이 외에도 해오름농장, 청오팜, 미영농장 등 몇 군데가 더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농부와 소비자가 직거래하는 도심 속 시장), ‘마르쉐@’ 역시 독특한 작물을 키우는 농가가 대거 출점하기에 요리사들이 즐겨 찾는다. 준혁이네 농장이 ‘마르쉐@’를 통해 요리사들과 관계를 맺게 된 대표적인 예다.

잊혀 가는 토종, 또는 야생 작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30년 전, 50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의 식재료였던 것들이 요리사들의 미각적 호기심을 통해 재발굴되고 있다. 김호윤 셰프가 토마토 샐러드에 사용한 사위질빵순은 ‘마르쉐@’에 참가하는 ‘들풀 한아름’ 자매로부터 받아온 것이다. 단지 특이한 식재료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전파된 것이 아니라, 그 털 많은 야생초에 얽힌 이야기까지 구전됐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화두다. 김 셰프는 “사위가 무거운 지게를 지지 못하도록 장모가 잘 끊어지는 사위질빵순으로 끈을 묶었다는 이야기로부터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옛날이야기를 전해줬다. 옛날이야기를 통해 할머니에서 손자, 손녀로 이어지던 흔하고 미약한 식재료들의 명맥이 사실상 끊긴 이 시대에 요리사들의 탐구열을 통해 맛의 계보도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흐름은 전 세계적인 미식 트렌드와도 맞물려 있다. 저 멀리 북유럽에서 발원한 노르딕 퀴진은 해를 거듭해 가며 현재까지도 중요한 미식 키워드인데 지역 안에서 나는 제철 재료, 또는 손수 채집한 야생 재료를 이용하는 것이 주된 골자다. 가장 한국적인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 그리고 가장 세계적인 맛이 가장 한국적인 맛이 된 셈이다.

['농부시장 마르쉐' 토종 식재료 팔아]
자연친화적 농법으로 특화… 요리 전문가들이 즐겨 찾아


사단법인 농부시장마르쉐가 2012년 10월 처음 개최한 ‘농부시장 마르쉐@’는 서울을 대표하는 파머스 마켓으로 자리 잡았다. 매월 둘째 일요일마다 혜화동에서 열리는 ‘농부시장’(6월은 9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농부의 맛을 지지하는 열성 단골들과 나들이객으로 언제나 북새통. 독특하고 신선한 식재료를 구매할 수 있기에 열성팬이 유독 많다. ‘마르쉐@’는 올해 4월부터 첫째 토요일 성수동에서, 넷째 화요일 합정동에서 열리는 작은 규모의 ‘채소시장’도 새로이 시작했다.

지난 5월 28일 합정동 카페 ‘무대륙’. 평일이었음에도 채소시장은 호황이었다. 미식계 셀러브리티들도 인파 사이를 오갔다. 김호윤·손종원(회현동 레스케이프 호텔 ‘라망 시크레’), 최지형(서교동 ‘서교고메’), 옥동식(서교동 ‘옥동식’) 셰프 등 요리사 외에도 이보은, 김보선 요리연구가 등 익숙한 면면들이었다. 너나없이 양손 무겁게 종이봉투를 안고 농부가 재배한 작물을 잔뜩 챙겨 돌아갔다.

5월 28일 열린 마르쉐@ 채소 시장에 참가한 근교농 베짱이 농부의 판매대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 마르쉐@

채소시장에 나온 농부들의 작물로만 차린 점심 식사 프로그램, ‘채소점심’에도 긴 줄이 늘어섰다. ‘뿌리온더플레이트’ 이윤서 셰프가 준비한 음식은 삽시간에 동나 예약을 놓친 이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마르쉐@’ 간판 농부들인 베짱이 농부와 꽃비원, 찬우물농장, 풀풀농장, 들풀 한아름 등 대부분의 농장들에서도 가져온 작물을 완판했다. 남은 작물은 ‘채소반’ 프로그램을 통해 요리해 먹는다.

자연친화적인 농법으로 키운 채소시장의 작물들은 맛과 향이 진하게 농축돼 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작물들도 ‘마르쉐@’ 농부시장과 채소시장에서 펼쳐지는 진풍경이다. 손종원 셰프는 “‘마르쉐@’에 나오면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식재료를 구매할 수 있기에 꼭 장을 보러 나온다”고 했다. ‘마르쉐@’의 모든 시장에 개근 중인 그의 장바구니에는 여러 농부에게서 구매한 적양배추 꽃, 개느삼 꽃, 돌나물 꽃, 고수 꽃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현재 80여 농가가 참여 중인 마르쉐@를 통해 준혁이네 농장 외에도 베짱이 농부, 꽃비원, 찬우물 농장 등 소농들이 스타 농부가 되기도 했다. 이보은 ‘농부시장마르쉐@’ 대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다품종소량생산 농부의 지속가능성을 증명하고 대량 유통 시대에 잊히기 쉬운 식재료의 힘을 존속시키는 것이 ‘마르쉐@’의 보람”이라고 말했다. 색다른 식재료와 농부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마르쉐@’는 다양한 식재료를 소비자에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맛과 세대 사이의 이야기까지 전래하는 매개로 활약 중이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