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한국 판단 잘하라" 보도 하루뒤.. 美대사, 대놓고 反화웨이 요구

노석조 기자 입력 2019. 6. 6. 03:17 수정 2019. 6. 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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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장비뿐 아니라 일반 기업용 인터넷 중계기도 쓰지말란 뜻
IT업계 전전긍긍.. 美대사, LG유플러스 거론하며 "안보 위협"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5일 서울에서 열린 '클라우드 미래' 콘퍼런스에서 "신뢰할 만한 5G(5세대 이동통신) 공급자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한국에 '반(反)화웨이' 전선 동참을 공개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꾸준히 우리 측에 화웨이 장비 사용의 위험성을 강조해 왔지만 지금까지는 주로 외교 채널을 통해 수면 아래서 이뤄졌다. 하지만 이날 해리스 대사의 발언은 기업에 대해 '미국 편에 서라'는 직접적인 요구였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5일 서울 강남구 페이스북코리아에서 열린 ‘클라우드의 미래’ 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해리스 대사는 이날 화웨이를 겨냥, “중국 업체는 안보상 문제가 있는 장비와 기술을 제공한다. 단순히 가격이 싸다거나 경제적인 면만 고려해선 안 된다”고 했다. 미 정부 당국자가 직접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화웨이 장비를 쓰지 말라’고 공개 촉구한 것은 처음이다. /연합뉴스

중국 외교부 당국자가 최근 방중한 한국 기자단에 "미국의 바람에 따라 동참할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져봐야 한다"며 "판단 잘하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미국이 대응 수위를 확 끌어올린 것이다. 외교 소식통은 "미·중 무역 전쟁이 날로 격화하면서 미·중 모두 한국에 점잖게 협조를 구하는 단계는 지났다"며 "미·중이 가운데 있는 한국의 팔을 거세게 잡아당기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고 했다.

이날 행사 참석자들에 따르면 해리스 대사는 기조연설 이후 가진 비공개 간담회에서 화웨이와 화웨이 장비를 쓰는 'LG유플러스'를 콕 집어 '안보 위협'을 거론했다. 국내 IT(정보기술) 업계에서는 "한국에서 화웨이를 퇴출하기 위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얘기가 나왔다. 미국 정부 당국자가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특정 기업의 사례를 언급하며 화웨이 사용 배제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유럽 동맹국, 일본 등에만 화웨이 장비 배제를 요구해 왔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최근 우리 정부에 '사드 보복'을 다시 꺼내며 압박하자 미국이 맞대응에 나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서 화웨이 장비 퇴출을 언급한 것은 단순히 통신 장비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에서 쓰이는 라우터(인터넷 중계·교환기) 같은 제품도 모두 배제하라고 요청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 인터넷 기업 고위 관계자는 "화웨이 장비 쓰지 말라고 한국에 선포한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화웨이 장비로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인터넷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IT 업계는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특히 해리스 대사가 지목한 LG유플러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미 LTE(4세대 이동통신)부터 5G망까지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고 있어 서비스 중단을 하지 않는 한 화웨이 제품을 바로 퇴출할 방법이 없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화웨이 제재가 시작된 이후 계속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IT 대기업도 장기적으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단기적으로는 삼성전자 등 국내 통신·인터넷 장비 업체들이 화웨이 제품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실적이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화웨이 실적이 계속 꺾일 경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같은 부품 수요가 줄어 한국 기업들에 타격을 줄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화웨이로부터 분기 매출 1조원 안팎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IT업계 관계자는 "시장 전체의 파이 측면에서 본다면 화웨이 타격은 IT산업 전반의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며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는 타격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IT업계는 이날 행사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당초 이날 행사에 대해 "한국인터넷기업협회와 공동 주최했다"고 밝혔으나 협회 측은 "공동 주최가 아니다"라고 반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이날 행사 참석이 자칫 미국의 '반화웨이' 동참 요구에 찬성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당초 화웨이 문제와 관련해 기업 간의 일에 정부가 개입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미·중이 "우리 편에 서라"는 요구를 점점 노골화하면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이 '반화웨이' 전선에 동참할 경우 중국이 사드 사태 때처럼 관광 제한 등 보복 조치에 들어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이달부터 중국 정부가 한국인의 상용 비자 발급 시 체류 일정을 자필로 작성하게 하는 등 심사 기준을 강화하면서 이 같은 우려가 더 커졌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앞으로 사드 배치, 화웨이와 같은 문제가 계속 벌어질 것"이라면서 "임시방편적으로 대처하지 말고 원칙을 세우고 일관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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